경향으로 보는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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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로 흥했다 망한 ‘화가 조영남’ 조영남씨(71)는 직업을 ‘화수’라고 말한 적 있다. 화가와 가수의 줄임말이다. 가수와 방송프로그램 진행자로 더 유명하지만, 스스로는 서울대 음대 시절부터 40년 넘게 ‘붓쟁이’로 산 자부심과 그림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미술시장의 화제가 된 것은 “딴따라 미술이면 어때?”라며 고집스럽게 그려온 화투 그림이다. 시인 이상의 초상화에 수백개의 화투짝을 붙여놓고, ‘비와 우산’이라는 그림에서는 화투패 비의 조각들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식이다. 그러나 미술의 새 조류로 매김하고팠던 화투 그림은 이제 법정에 서게 됐다. 무명 화가들에게 10만원씩 줘 붓질하도록 한 그림에 가벼운 덧칠이나 사인만 해 수십만·수백만원을 받고 내다 판 그에게 ‘사기’ 범죄의 굴레가 씌워진 것이다. 박수근·천경자·이우환까지 ‘위작’ 시비..
‘즐거운 사라’, 즐겁지 못한 마광수 문학을 법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가. 소설가 염재만의 는 1969년 외설이라는 딱지를 달고 7년의 세월이 흐른 뒤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염재만은 그의 작품으로 구속되는 날벼락은 맞지 않았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 마광수는 마흔 한 살에 음란물을 쓰고 배포한 혐의로 징역살이를 했고 40대의 10년을 잃었다. 사회는 발전한다고 하지만 예술의 다양성에 대한 관용은 오히려 퇴보했다. 마광수. 그는 1989년 문학사상에 를 연재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이어 수필집 와 시집 등을 내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마광수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1992년 소설 를 낸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검찰이 음란물이라는 낙인을 찍으면서 명문대 국문학과 교수였던 그는 ‘변태 교수’ ‘음란 작가’로 추..
1999년 5월31일 ‘투자 귀재’ 박현주, 이젠 ‘야망의 사냥꾼’ 그의 첫 직장은 1986년 입사한 동원증권이다. 광주제일고를 나온 그는 대학(고려대 경영학과) 재학시절 ‘자본시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등록금·하숙비 등 1년치 생활비를 한꺼번에 받아 주식투자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재테크의 기본기를 다졌다. 그는 연봉 1500만원을 받던 동원증권 평사원 시절부터 ‘승부사’ 기질을 보였다. 투자 종목을 정할 때 루머에 따르지 않고, 기업 내재 가치에 주목했다. 그러자 투자하는 종목마다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입사 45일 만에 대리, 1년1개월 만에 과장, 4년6개월 만에 33세의 전국 최연소 증권사 지점장(압구정지점장)이 됐다. 1993년과 1995년, 1996년엔 전국 최고 약정액(증권사 직원이 고객으로부터 받은 매매 주문액)을 기록해 억대 연봉자가 됐다. 입사 10년 ..
1993년 12월2일 “날치기는 생각하기조차 싫다” 국회의장에게 누가 충고하고 항의한다는 말이냐. 국회의장이 여당 눈치만 살피는 것 그 자체가 개혁돼야 한다. 여야 모두 군사문화시대의 생각을 버려라.” 1993년 7월 초 이만섭 국회의장이 의사진행 절차를 따지러 온 집권당(민자당) 원내총무에게 뱉은 말이다. 당시 여당은 대정부 질문 때 김영삼 대통령을 비난하는 야당(민주당) 의원의 신상 발언을 왜 허용했느냐며 이 의장을 비겁자, 배신자라고 공격했다. 이 의장은 취임 초부터 “내가 입법부 수장으로 있는 한 날치기는 절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날치기는 생각하기조차 싫다. 국회는 결코 여나 야만의 국회가 아닌 국민 모두의 국회”라고 강조했다.(1993년 12월2일자) 이 의장은 실제로 새해 예산안을 강행처리해 달라는 YS의 요구..
1987년 12월1일 ‘개그맨 코믹 캐럴송 인기’ 언제부턴가 길거리에서 캐럴이 들리지 않는다. 그 많던 캐럴은 다 어디로 숨었는가. ‘징글벨’ 노래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물론 캐럴 음반을 내는 가수나 연예인들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1980년대 중반은 캐럴의 황금기였다. 음반시장에서는 다양한 캐럴 음반이 발매됐다. 국내외 가수, 합창단은 물론 코미디언들도 캐럴 음반을 냈다. 조용필·조영남·혜은이·이용·김도향 등 국내 정상급 가수, 마이클 잭슨·앤디 윌리엄스·호세 펠리치아노 등 외국 가수, 빈 소년합창단과 같은 합창단도 가세했다. 당시 두드러진 특징은 어린이를 상대로 한 캐럴 음반의 붐이다. 등 어린이 고객을 대상으로 한 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어린이용 캐럴 음반 붐의 주인공은 심형래였다. 심형래가 만든 음반은 이른바 ‘코믹 캐럴’이라 불릴 수 있는 ..
1996년 12월17일 ‘술 없인 안됩니까’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면 한해의 끝이 느껴진다. 경향신문은 1996년 직장인이 맞는 세밑 풍경을 ‘매거진X’에 소개했다. “입사 2년차인 곽용선씨(28)는 아침마다 수첩을 뒤적인다. 12월의 스케줄 표에는 빨간 동그라미가 모두 10개. 직장·동문·친구들의 망년회가 이틀 걸러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다. 대부분 회식과 노래방, 단란주점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답습한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망년회 몇 개를 추가하면 매일 술에 절어야 할 판이다. 술이 없으면 허전한 세대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한, 구세대식 망년회는 계속될 것 같다. 권위적인 술판에서 자유롭고 싶다. 신·구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망년회는 없는가.”(12월17일자) 20년 가까이 흐른 2015년 직장인들의 송년 맞이 풍경은 달라졌을까. 그렇지는 ..
1992년 6월3일 리우 환경회담 개막과 캐나다 12살 소녀의 외침 1992년 6월 전 세계 100여개국 정상을 비롯해 185개국 대표들이 ‘환경정상 회담’을 갖기 위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모였다.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라는 공식 명칭을 쓴 이 회담은 이산화탄소 방출 규제를 통한 지구온난화 방지 및 동식물·천연자원 보호 등 두 가지 의제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가 ‘하나뿐인 지구’가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고하는 회의였다면, 리우 환경회담은 지구를 살리기 위한 실천적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경향신문은 그해 6월3일자 1면에 ‘리우 환경정상회담 개막’ 소식을 전했다. 경향신문은 기사에서 “회담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은 지구 환경보전을 위해 시급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쉽사리 의견을 모을..
1988년 11월10일 정주영 회장 5공 청문회 증언 세상에 올 때 내 마음대로 온 것은 아니지만/ 이 가슴에 꿈도 많았지/ 내 손에 없는 내 것을 찾아/ 뒤 볼 새 없이 나는 뛰었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생전에 애창했다는 ‘별셋’ 트리오의 ‘보통인생’ 가사 일부다(경향신문 1990년 12월28일자). 마치 정 명예회장의 인생역정을 노래하는 듯하다. 정 명예회장의 일생은 뒤 돌아볼 새 없이 뛴 ‘특별한 인생’이었다.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드는” 불굴의 정신으로 숱한 성공신화를 일궈냈다. 그가 세운 기업은 대한민국 경제의 뼈대를 이뤘고,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왕회장’에 등극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신념은 죽는 날까지 뒷방 늙은이로 남기를 거부했다. 엊그제는 그가 탄생한 지 100년 되는 날이었다. 곳곳에서 그의 기업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