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김종직과 김굉필 사이에서

누구나 알고 있듯이 조선왕조는 유학을 최고의 정치적 사회적 가치로 천명했다. 그 유학을 창시한 공자를 기려서 제사 지내는 곳이 문묘(文廟)이다. 문묘는 서울의 성균관과 지방의 모든 향교에 있었다. 그런데 문묘에서는 공자뿐 아니라 함께 기려야 할 그의 제자들 위패도 있다. 그중에는 신라, 고려, 조선시대 제자들의 것도 있다. 모두 18명인데, 조선시대 인물이 14명이다.


조선시대에 누군가가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것은 그 후손과 제자들에게 대단한 사회적, 학문적 명예가 더해지는 것이었다. 그 선정을 둘러싸고 이견과 뒷말이 없지 않았다. 집권 당파에 속하는 인물이 배향될 가능성이 높았고, 반대 당파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조선시대 인물들 중 처음으로 배향된 5명에 대해서는 그런 당파 간 이견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당파가 나뉘기 이전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명실상부하게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자신들 중 최고라고 생각했던 인물들이다.


조선시대 인물 중 최초로 문묘 배향이 요청되어 문묘에 배향된 인물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1454~1504)이다. 점필재(畢齋) 김종직(1431~1492)의 제자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살펴보면 왜 김종직이 아닌 김굉필이 문묘에 배향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회적 기준에서 보면 김종직은 너무나 대단했고, 김굉필은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김종직은 23세에 진사가 되고 30세에 문과에 합격했다. 과거 합격 다음해에 사가독서를 했다. 과거 합격과 사가독서 정도가 그의 우수함의 증거는 아니다. 그는 그 이상이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이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건국 후 그의 시대까지 조선의 학문과 문장은 중앙정부가 만든 학교와 그 학교를 졸업한 서울 사람들이 이끌었다. 경상도 밀양 출신 김종직은 이런 흐름을 바꾼 사실상 첫 번째 지방 출신이다. 우수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다. 또 그는 탁월한 스승이었다. 그의 제자로 파악되는 인물이 60여 명인데, 문과 합격자가 무려 48명이고 장원 급제자만 13명이다. 그의 스승으로서의 면모가 이황, 이이 같은 인물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는 이미 조선시대에 나왔다. 김종직은 자기 실력으로 조선의 인재 선발 흐름을 바꾸었고, 조선을 통틀어 가장 탁월한 스승이었다.


김굉필은 21세에 김종직을 만나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의 권유로 <소학>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소학>은 아이들이나 읽는 책이었다. 김굉필은 30세가 될 때까지 <소학>만 읽어서 ‘소학동자’가 그의 별명이 되었다. 27세에 생원시에 응시하여 3등 제32인으로, 다시 말해서 거의 꼴찌로 합격했다. 그것으로 과거시험과는 더 이상 인연이 없었다. 김굉필은 41세 되던 해에 추천을 받아서 능참봉이 되었다. 그의 첫 번째 관직이다. 이후 몇 차례 승진했지만 4년 뒤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스승 김종직이 부관참시를 당한 사건이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멀리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을 갔다. 2년 뒤 귀양처가 전라도 순천으로 바뀌었고 다시 4년 뒤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죄가 더해졌다. 그에게 사형 명령이 내려졌다. 그때 나이 51살이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김굉필 생애에서 기릴 만한 것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자 역시 김종직의 제자인 남효온은 김종직의 제자 50여 명을 소개한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을 남겼다. 이 책에 첫 번째로 소개된 인물이 김굉필이다. 기라성 같은 제자들 중에서도 그가 최고였다는 함의가 있다. 남효온은 김굉필과 나이가 같았다. 말하자면 이미 김굉필 당대에 그는 김종직 제자들 중에서 최고였다는 뜻이다.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이다. 김굉필이 죽은 지 1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때에는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이황이 이를 다시 주장했고, 그 요청은 마침내 관철되었다. 조광조만 김굉필의 문묘 배향을 주장했던 것이 아니다. 김굉필의 제자와 후학들이 탁월했던 김종직을 건너뛰어 김굉필의 문묘 배향을 주장했던 이유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김굉필이 가장 밀도 있게 체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 시대가 누군가를 기리는 것은, 기려지는 사람이 체현하는 가치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기림은 정치적이며 동시에 이념적이다. 김굉필과 그를 이은 세대는 개인의 우수함이 아니라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를 기렸다. 그런 지향이 마침내 그들이 원했던 방향으로 조선 자체를 바꾸었다. 


어느 시대나 개인의 우수함과 공동체적 가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양자에 대한 지향은 결국 상대적 비중의 문제이다. 지금 우리는 두 가지를 어떤 비중으로 지향하는가? 아무래도 앞쪽에 너무 많이 치우쳐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개인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를 기리기보다, 각자의 욕망에 따라서 누군가를 부러워한다. 과연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 있는가?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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