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백성의 벗, 재상 김육

1658년(효종 9) 재상 김육은 79세의 노령이었다. 그해 8월26일 아침, 그는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절감하였던지 손자인 김석주를 불렀다. 임금님에게 올릴 마지막 상소를 불러줄 테니까 받아적으라는 거였다. 손자가 대신 기록한 김육의 유소(遺疏)였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소신의 병이 몹시 깊어서 실낱같은 목숨을 얼마나 이어갈지 모르겠습니다. 전하의 용안을 다시는 뵙지 못할 것 같아 궁궐을 바라보니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올해 농사가 흉년이라서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하필 천민을 올려서 양민으로 삼는다니 걱정이 큽니다. 부담이 커진 백성의 불만이 높을 테니, 전하께서도 결국 후회하게 되실 것 같아 걱정입니다. 지금이라도 명령을 취소하시기를 앙망합니다.


호남에서 대동법을 시행하는 일, 소신은 서필원을 전라도 감사로 추천하여 그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신이 이제 죽고 말면, 아무도 돕는 이가 없어서 중도에 폐지될 염려가 큽니다. 아무쪼록 서필원이 호남으로 내려갈 때 전하께서 그를 불러 대동법의 시행에 힘쓰라고 간곡히 당부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소신이 바라는 대로 대동법을 꼭 시행하게 하소서.(실록, 효종 9년 9월5일 참조).


효종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김육이 올린 상소문을 읽고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경의 상소를 읽고 많이 놀랐다. 아뢴 것은 모두 간절한 바라서 어찌 내가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호남의 대동법 시행은 걱정하지 말라. 적임자를 정하여 맡겼으니 우려하지 말라. 경은 나이가 많더라도 아직 강건하므로 천지신명이 도와주리라. 반드시 쾌차하기를 바라노라.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효종은 김육의 생사가 염려되었다. 왕은 의원을 보내어 절대 자리를 떠나지 말고 김육의 병상을 돌보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김육은 자신의 최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러 관리가 병문안을 오자 그는 단정하게 앉아서 평소처럼 태연하게 맞았다. 전라감사 서필원도 찾아왔는데, 김육은 간절한 어조로 호남에서 반드시 대동법을 올바로 시행하기를 거듭 당부하였다. 또 이웃에 사는 영의정 정태화에게 사람을 보내서 “호남의 대동법은 전하께서 이미 결정하신 일입니다. 그대가 처음부터 끝까지 힘써 협력해주시기 바랍니다”라며 도움을 부탁하였다.


그해 9월4일, 밤이 되자 자제들을 불러놓고 서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최후에 그는 다시 물었다. “전라감사 서필원이 대동법에 관해 올린 상소에 대하여 조정의 의논이 어떠했는가?” 그 일이 잘 진행될 거라는 답변을 듣고 크게 안심한 듯, 김육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김육은 젊은 시절 불우하였다. 광해군 때는 조용히 산속에 묻혀 몸소 농사짓고 글을 읽으며 지냈다. 그러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문과에 합격해 요직을 거친 다음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자신의 사명으로 여겨 정승이 되자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였고, 마지막에는 호남에도 이 법을 시행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부음이 전해지자 효종은 슬퍼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면 김육처럼 확고부동한 인재를 다시 얻을 수 있을까.”


호남에도 대동법을 시행하려는 김육의 노력은 어떤 결실을 거두었을까. 다산 정약용은 전후 사정을 충실히 서술했다(경세유표, 제11권, 방부고).


1660년(현종, 원년) 7월, 우선 전라도 산간 지방에서 대동법을 시행했다. 김육이 작고한 지 2년 뒤였다. 그보다 3년 뒤 이 법은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현종은 부왕(효종)의 뜻을 받들어 대동법의 시행을 서둘렀으나 대신들의 반대가 완강했다. 그들은 양반 지주(‘豪民’)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 법은 백성의 부담은 줄이고 지주의 세금은 조금 늘리는 제도였다! 현종은 재상 김육이 왜, 대동법의 시행에 그토록 매달렸는지를 분명히 이해하였다.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정승과 왕이라야 이 법을 추진할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정치가는 거의 없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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