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사비니 여인의 납치 사건

고대 로마제국을 이야기할 때 흔히 로마의 평화, 포용성, 선진 문명 전파 등을 언급한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은 로마가 정복한 지역에 기반시설을 구축하고 경제를 발전시킨 사례로 거론된다. <로마인 이야기>로 국내에 널리 알려진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적으로 민족의 차이, 문화의 차이,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들을 모두 감싸안은 보편 제국을 수립한 것은 로마뿐이라면서 로마의 포용력을 칭송한다. 다수의 역사가들은 정복과 피의 대가로 세운 로마의 질서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로마제국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로마의 역사를 미화하는 저작들은 넘쳐난다. 그러나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던 로마의 초기 역사는 음모, 폭력, 친족 살인, 납치와 강탈 등 야만적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고대 로마를 건설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그들 형제가 암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그림이 잘 알려져 있다. 이들 형제는 태어나자마자 외할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한 작은 외할아버지에 의해 살해될 위기에 처했지만 온갖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권력을 잡았다. 외할아버지의 권력을 다시 찾은 두 형제는 곧바로 경쟁 관계에 들어갔고 형인 로물루스는 결국 동생을 살해하고 로마라는 나라를 세웠다. 


로물루스는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 망명자, 탈주 노예, 범죄자 등을 이주민으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여성이 부족해지자 성대한 축제를 여는 척하고 초대에 응한 다른 부족들의 여성들을 강탈했다. 고대 로마의 작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 로물루스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주변 부족들의 오만에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오만한 부모가 부족 간 통혼을 거부해  이런 일이 벌어졌으며 잘못은 그들 부모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딸과 누이를 잃은 주변 부족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이들 민족 중 가장 강력했던 사비니인들은 3년 후 로마를 공격했다. 양측은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때 사비니 여인들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옷을 찢으면서 분노하는 양쪽의 전사들을 떼어놓았다 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이미 남편이 된 로마 병사들이 서로 피를 흘리는 저주를 피해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고 한다. 리비우스는 이러한 호소 덕분에 양쪽은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공존을 도모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고대 로마인들은 납치를 통한 강제 결혼을 기억하고 기념했다는 것이다. 이후 로마인들은 결혼식에서 신부 행차 시 “탈라시우스(Talasius)”라고 외치는 관행을 만들어냈다. 리비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납치한 여성 중 월등하게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는데 이 여성을 납치한 한 무리의 종복들은 누구 집으로 데려가느냐는 질문에 자신들의 주인 탈라시우스라고 외쳤고 이것이 결혼식 풍습의 기원이 되었던 것이다. 충격적이게도 플루타르코스와 키케로는 이 납치 사건을 로마 사회의 초석이자, 로마식 결혼의 기원이자 정수로 간주했다.  


로마인이었던 리비우스는 로마인의 편에서 이 사건을 정당화했고, 그의 해석에 당대인들은 동의했다.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아스>에서 로마 건국의 조상인 안키세스의 입을 빌려 “당신, 로마인이여. 당신들의 권위로 다른 민족들을 지도해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전통을 접목하여 평화를 일구고 정복당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며 거만한 자들과는 그들이 굴복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다”라면서 로마가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정복한 것이 로마의 운명이고 정복이 평화와 자비를 가져다준 것이라고 자신들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침략자인 제국의 논리다. 사비니 여인의 납치는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강제 납치이자 겁탈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전쟁을 하다보면 흔히 있는 불행이며 이후 로마와 사비니가 연합하여 위대한 로마 건설에 동참했다고 해서 이 명백한 폭력이 평화와 통합으로 정당화되고 미화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침략했던 유럽 국가들이 이 침략이 근대화를 가져온 것으로 미화하고 더 나아가서는 백인의 책무라고까지 주장하는 것 또한 침략 행위를 문명 전파로 포장하는 것이다. 일본이 한반도에 선진 문명과 기술을 전파하고 한반도를 근대화시켰다는 주장 또한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제가 철도, 병원, 근대식 건물 등을 건설한 것은 한반도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함이었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것이나 조선인과 근대 문명의 혜택을 함께 나누는 박애주의 행위가 아니었다.


“로마인들은 약탈하고 살해하고 강탈했다. 이를 제국이라 잘못 부르고 있다. 그들은 황폐화시켜놓고 이를 평화라고 부른다”고 말한 타키투스의 비판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일 것이다. 사비니 여인 납치 사건을 말 타고 칼과 창을 들고 있는 병사들이 순수한 어린아이와 비무장의 여인을 짓밟는 모습으로 그려낸 피카소의 그림이 역사적 진실을 반영한다.


<남종국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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