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신라시대 3대 판결문



1988년 3월20일 경북 울진 죽변면 봉평 2리 마을 이장 권대선씨는 길 옆 개울에 처박혀 있던 명문비석을 확인하고는 관계당국에 신고했다. 비문 내용은 “524년(신라 법흥왕 11년) 모직지매금왕(법흥왕) 등 14명의 6부귀족이 회의를 열어 이야은성에 불을 내고 성을 에워싼 마을의 유력자들을 곤장 60대와 100대형에 처한다”는 판결문이었다. 울진 봉평비(국보 제242호)이다. 1989년 3월 경북 영일군 신광면 냉수 2리의 마을주민 이상운씨도 자기 밭에 박혀 있던 명문비석을 찾아냈다. 영일 냉수리비(국보 제274호)이다. ‘503년(지증왕 2년) 마을주민들이 재물(財)을 둘러싸고 다투자 지증왕 등이 재판 끝에 특정인(절거리)의 소유로 결정했다’는 판결문이었다.


2009년 5월11일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 주민 김헌도씨는 화분받침대용으로 옮겨온 돌에서 수백자의 글자를 확인했다. 포항 중성리비(국보 제318호·사진)이다. 전문가들은 고졸한 형태의 ‘신사(辛巳)’ 등 203자를 확인하고는 501년 혹은 441년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신라비라며 흥분했다. 하지만 글자를 읽어낼수록 ‘대략난감’이었다. ‘세령(世令)’ ‘궁(宮)’ ‘백구(白口)’ 등 이른바 ‘듣보’ 표현이나 문장이 줄줄이 나왔다. 6세기 초 왕경인과 현지인이 뒤얽혀 무언가를 뺏고 빼앗겨서 분쟁이 생겼고, 중앙정부가 판결문을 고지(告知)한 내용’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분쟁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지금까지도 특정되지 않았다.


최근 발견 10년을 맞아 열린 학술대회에서 5~6세기 중성리 분쟁의 대상은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收租權)’이라는 주장(하일식 연세대 교수)이 제기됐다. 즉 조선 전기까지도 국가는 공무원들에게 녹봉을 직접 지급하는 대신 공무원들이 직접 세금을 거둘 수 있는 토지를 배정했다. 이것이 수조권이다. 그런데 중성리 비석 내용을 보면 “토지 1곳에 7~8명에 이르는 수조권자들이 앞다퉈 세금을 거둬가는 통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고려사>)는 고려 말의 상황이 5~6세기 신라에서도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궁’으로 표현된 왕·귀족이 수조지를 빼앗자 중앙정부가 나서 “되돌려주라”는 판결문을 대중 앞에서 낭독하고 “재발하면 중죄로 다스리겠다”는 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눈썰미 좋은 마을 주민들이 찾아낸 이 신라시대 3대 비석판결문은 1500년 전 신라인의 ‘삶의 애환’이 담긴 생생한 1차자료이다.


<이기환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