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아베의 공과

조선 후기 문인 교와(僑窩) 성섭(成涉·1718~1788)은 경북 칠곡의 시골 마을에서 두문불출하며 독서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곤 주변에 사는 선비 몇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를 만나본 사람은 누구나 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성섭의 학문적 성향은 대개의 영남 선비와 사뭇 달랐다. 그의 독서 범위는 당파를 넘나들었으며, 명·청의 최신 서적도 입수해 읽었다. 광범위한 독서를 바탕으로 국제정세를 조망하는 그의 안목은 놀라울 정도다.


당시 명나라가 멸망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조선 집권층은 여전히 ‘오랑캐’ 청나라가 곧 멸망하고 새로운 한족 왕조가 출현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성섭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지배 이념이었던 대명의리론이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이며, 노론의 집권을 공고히 하려는 수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성섭은 청나라가 안정을 누리고 번영을 구가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 예언은 적중했다.


일본을 바라보는 관점도 독특하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과가 반반이라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면 임진왜란의 원흉 아닌가. 7년 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백성은 둘째치고, 임진왜란 당시 성종과 중종의 능을 파헤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사대부에게 화해 불가능한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런데 공과가 반반이라니. 설명을 들어보자.


“임진왜란으로 팔도가 어육이 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악행 때문이지만, 당시 방비하는 계책 역시 소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로 왜구가 변방을 노략질한 일이 없는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열도를 통일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일본 열도는 각기 군주가 있어 우리나라 남쪽 변방을 침략하여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변방 고을의 우환이 컸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한 뒤로는 이 우환이 사라졌으니, 그는 공로와 죄악이 같다고 하겠다.”


<필원산어>에 나오는 말이다. 성섭은 임진왜란이 한국사에 미친 영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인해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겪었지만, 이후 왜구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은 불행 중 다행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왜구라는 존재가 한국사에 미친 영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략은 고려 말엽에 접어들어 절정에 달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것만 500회가 넘는다. 왜구의 활동 범위는 남부 해안에서 전국 해안으로, 그리고 내륙 지역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국왕이 천도를 고려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왜구의 창궐은 고려 멸망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조선 건국 이후로도 왜구는 여전히 심각한 위협이었다. 왜구가 장기간에 걸쳐 우리에게 입힌 피해는 임진왜란 못지않다.


왜구의 실체, 그리고 그 발생 및 소멸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일본 내부의 정치 혼란이 왜구 발생의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은 이견이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을 완결지어 왜구의 뒷배를 보아주던 지방 영주들을 통제하에 넣고, 이어 해적 행위를 금지하면서 왜구가 점차 소멸했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구를 근절했다는 성섭의 주장은 사실에 가깝다. 물론 왜구 근절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그가 조선을 위해 왜구를 없애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구 근절은 군사력 확대와 대외무역 이권 확보 등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한 조처였다. 이렇게 정규군으로 편입한 왜구가 결국 조선 침략의 첨병이 됐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 후 300년간 막부 체제의 안정으로 왜구가 조선에서 자취를 감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왜구의 근절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역사는 주체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하는 법이다.


한·일 갈등이 격화된 탓에 지난 한·일관계사를 자주 환기하곤 한다. 일본의 경제보복을 임진왜란에 빗대어 ‘기해왜란’이라고도 하고, 불매운동을 의병활동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순신에 빙의한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토착왜구, 친일파라는 비난도 과거와 현재를 동일시한 결과다. 그러나 이처럼 지난 역사를 끌어들여 현실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달라진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각주구검(刻舟求劍)에 가깝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놓치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역사와 현실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역사는 문제를 제기할 뿐 해답은 제공하지 않는다. 섣부른 비교도, 예측도 금물이다.


당면한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다만 역사의 흐름이 때로 의도치 않은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점에 희망을 걸고 싶다. 현시점에서 아베의 ‘과’는 한일협정 이후 반세기 동안 그럭저럭 양호했던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공은 무엇일까. 낙관론자들이 기대하는 기술 독립과 경제주권 회복일까. 아직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지금은 사태를 예의주시하며 냉철하게 대응할 뿐이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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