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여적]옥바라지 골목

안악사건으로 체포된 백범 김구는 1911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그곳에서 만 4년을 옥살이했다.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는 형무소 맞은편 골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번 돈으로 아들에게 사식을 넣었다. 1919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가 갇혔던 곳도 서대문형무소다. 그의 옥바라지를 담당했던 누이와 동생들 역시 곽낙원 여사가 머물렀던 골목에 살았다.


서대문형무소는 한국 최초의 근대 감옥이다. 일제는 독립운동가와 정치사상범을 체포하는 족족 그곳으로 보냈다. 백범, 강우규뿐 아니라 유관순, 손병희, 김좌진, 여운형 등이 그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기결수감자만 평균 1500~2000명에 달했다. 자연스럽게 주변에 옥바라지하는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옥바라지 골목.’ 서대문형무소 건너편, 지금 서울 종로구 무악동 45~46 일대가 그곳이다.


해방 이후에도 옥바라지 골목은 계속됐다. 1970~19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시국사범 수감자 가족들의 차지였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를 비롯해 반독재투쟁으로 투옥된 민주인사의 가족들이 여관에 묵거나 거처를 마련해 옥바라지를 했다. 골목은 여러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됐다. 현진건은 장편 <적도>에서 ‘독립문을 지나서부터 형무소 초입까지 ‘형무소 사식 차입소’ ‘감옥밥 파는 집’ ‘형무소 피고인 차입소’ ‘변당(도시락) 차입소’ 간판들이 지붕을 디디고 선 것만 보아도 어쩐지 으스스해진다’고 묘사했다. 인왕산 아래에서 유년기를 보낸 박완서는 장편 <엄마의 말뚝> 등에서 옥바라지 골목의 풍경을 담아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무대도 이곳으로 알려졌다.


1987년 의왕구치소가 설립되면서 서대문형무소는 역사관으로 탈바꿈했다. 이에 맞춰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살려야 한다는 여론이 거셌다. 재개발반대대책위가 구성되고 ‘옥바라지 선교센터’가 꾸려졌다. 그러나 자본의 힘을 꺾을 수 없었다. 2016년 옥바라지 골목이 철거됐다. 올해 초에는 재벌회사가 분양한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래도 ‘기억투쟁’은 계속됐다. 마침내 서울시가 철거된 골목 한켠에 기억공간을 마련했다. 20일 개관하는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이 그것이다.


<조운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