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역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얼마 전에 ‘중세 말 피렌체로 팔려온 타르타르 노예’라는 제목의 논문을 준비하다가 우연하게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어머니가 중국인 노예였다고 주장하는 책을 발견했다. 일견 황당해 보이지만 동시대에 이탈리아 도시들에 아시아 출신의 노예가 다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대개 16세기 대항해 시대 이전엔 유럽과 아시아가 직접 교류를 하지 않았다고들 알고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실제로 몽골이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세계제국을 건설한 13~14세기에 다수의 아시아 출신 노예들이 유럽으로 팔려갔다.


14세기 중엽 흑사병으로 인구가 격감한 유럽은 흑해를 통해 여러 민족의 노예들을 수입했다. 당시 흑해 지역에서 활동한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타르타르 노예를 피렌체 등지의 이탈리아 도시들에 공급했다. 엄밀하게 구분하면 타르타르와 몽골족은 다른 민족이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몽골 사람들을 타르타르(tartar)인이라고 불렀다. 공포 때문이었다. 몽골의 노도와 같은 침략으로 공포에 질린 유럽인들이 동방에서 온 유목민족을 지옥이라는 뜻의 라틴어 타르타루스(tartarus)로 부르게 된 것이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이탈리아로 끌려온 몽골 노예들 중에 고려인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이 또한 터무니없는 상상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많은 고려인들이 몽골로 강제로 끌려갔고, 이들 중 일부가 서유럽까지 팔려갔을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몽골의 칸들은 채무를 변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국 신민들을 해외에 노예로 파는 행위를 엄격히 단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거나 가난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노예 상인에게 넘기는 등 다양한 이유로 많은 이들이 먼 이국땅으로 팔려나갔다. 당시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물건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노예의 몸값은 가축 가격과 함께 기록되곤 했다.


더 슬픈 이야기는 중세 말 피렌체로 팔려온 타르타르 노예들 중 다수가 주로 10대 후반의 소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에 대한 꽤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피렌체 정부가 노예를 구입한 사람에게 이 사실을 시청에 신고하고 세금을 내도록 했기 때문이다. 신고 서류에는 노예의 신체적 특징과 인적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1366년 7월4일 우고라는 피렌체 시민은 스타마티라는 이름의 타르타르 여자 노예를 30두카토에 구입했다고 신고했다. 노예의 나이는 18살이었고, 키는 중간보다 약간 컸고, 피부색은 올리브색이고, 코는 크고 코 위엔  검은색 점이 있었고, 귀는 뚫었다. 노예 구매 가격은 당시 장인의 1년치 연봉보다 조금 적은 정도였다. 그런 연유로 피렌체 귀족뿐만 아니라 부유한 도시민들도 낯선 이방인 노예들을 살 수 있었다.


스타마티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이방인 여자 노예들이 이탈리아 남자 주인들로부터 성적 으로 학대를 당했다. 이들은 주인의 아이를 낳았고 이렇게 태어난 혼혈아들은 버려지기 일쑤였다. 노예를 바라보는 여주인들의 시선도 따가웠다. 그들은 젊은 여자 노예들이 성적으로 문란하고 음탕해 서 모범적인 하녀들과 주인집 딸까지 타락시킨다고 불평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가 말한 것처럼 이탈리아 여성들에게 아시아의 여자 노예들은 “집 안에 있는 적들”이었다.


자료 조사 과정에서 시선을 끄는 노예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안토네토라는 기독교식 세례명으로 불렸던 몽골 소년 노예였다. 이 어린 몽골 소년은 당돌하게 자신은 자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노예로 팔릴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근거로 피렌체시에 자유를 달라고 호소했다. 물론 몽골 소년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소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궁금해 피렌체 문서고를 방문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행적을 알려주는 문서를 찾지 못했다.


노예와 같은 피지배계층은 오랫동안 역사 서술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역사는 항상 왕후장상 등 지배계급의 역사였고 그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기술되어 왔다. 그렇지만 20세기 후반 유럽 역사학계는 이처럼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역사’ 쓰기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단 심문을 받았던 농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중세 말의 유럽 역사를,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출신의 방앗간지기를 통해 변화의 16세기를, 주인의 고양이를 학살하고 소극적인 저항을 했던 파리의 인쇄공들을 통해 계몽시대 프랑스를, 노동계급이 계급의식을 갖는 과정을 통해 산업혁명 시대의 영국을, 노동자와 일반 대중의 삶을 통해 나치시대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500년 조선 왕조의 역사를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만이 아니라 허난설헌과 전봉준의 삶을 통해서도, 20세기 한국사를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거해 일어났던 학생들, 독재정권 시절 열악한 노동조건하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보통의 노동자들,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싸웠던 전태일의 삶을 통해서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과 어떤 사건들을 통해 역사를 배우고 기억하느냐는 그 나라의 역사의식, 역사의 수준과 품격 그리고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남종국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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