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최익현의 운명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쳐들어올 기세였다. 강적과 싸우지 말고 평화조약을 맺는 편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호남의 대학자 노사 기정진은 결사반대했다. 그는 군비 강화의 방법을 조목조목 제시하며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흥선대원군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그때 근기의 석학 화서 이항로도 똑같은 입장을 밝혔다. 위정척사론이었다. 각지에서 선비들의 호응이 빗발쳤다. 그들은 외세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기로 다짐했다.


이후 갈수록 국운이 기울었다. 선비들은 할 수 없이 목숨을 걸고 의병투쟁에 돌입했다. 면암 최익현은 그중 하나였다. 그는 이항로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기에 더욱 강경했다. 1876년 일본과의 통상조약이 체결될 때부터 최익현은 격렬히 반대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시대착오라고 여겨질 수도 있으나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최익현은 우리가 물렁하게 열강에 순순히 머리를 조아리면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야 말 줄을 확신했다. 틀린 예측이 아니었지 않은가.


그의 염려대로 1905년에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최익현은 의병운동으로 맞섰다. 그의 나이 이미 74세였다. 전라도 태인과 순창의 유생들이 적극 호응하였으나,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분명했다. 적군에게 체포된 최익현은 쓰시마섬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제자 임병찬에게 유소(遺疏·죽으면서 올리는 상소)를 구술하고는 세상을 등졌다.


위정척사 운동은 딜레마였다. 선비들은 한발도 더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상황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던져서라도 학문적 신념을 지키고 국가를 수호하려 했다. 그러나 당면한 형세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적을 이길 수는 없어도 결코 물러설 수도 없는 비극적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선비들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값싼 타협을 하지 않았다. 위정척사 운동은 지극히 숭고한 실천운동이었던 것이다.


최익현이 쓰시마로 끌려가자 광양의 우국지사 매천 황현은, 애끓는 마음을 담아 한 편의 시를 썼다(<매천집>). “나라에 큰 공 세운 신하(최익현)라서 웃음 띤 한 말씀으로도 하늘의 법도를 세우셨네(宗臣談笑植天經)/ 의리를 따질 때면 저울에 눈금이 있다 하셨지(算定熊魚秤有星)/ 한 번 울린 북소리와 의로운 함성, 굳센 선비들(의병)이 가여워라(一鼓義聲憐勁草)/ 포로의 차림새는 부평초와 같으오(南冠行色感漂萍)// 다행이네, 구슬픈 임의 노래 장동창(명나라 충신·제자 임병찬)이 함께하시네(悲歌幸伴張同敞)/ 그나마 맥술정(충신 문천상의 숙적)을 만나지 않아 시원하다오(快事難逢麥述丁)/ 임의 외로운 배, 바다에 뜬 모습 그림으로 담아내어(擬寫孤帆浮海影)/ 천 년 뒤 단청에 쓸까 하오(千秋在後補丹靑).”


이 시는 최익현과 그의 제자 임병찬의 충절을 노래한 것이다. 마지막 한 구절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임의 외로운 배, 바다에 뜬 모습 그림으로 담아내어 천 년 뒤 단청에 쓸까 하오”라 했다. 


황현은 충신들이 적국으로 끌려가고만 비극을 잊지 못했다. 언젠가 조국이 광명을 되찾는 날,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을 지어 넋이나마 위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황현도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1910년 8월29일, 조선은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혹독한 식민지의 운명이 저승사자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9월8일 황현은 ‘절명시(絶命詩)’를 지었다. 그 이틀 뒤 선비는 세상을 버렸다. 향년 56세였다.


황현은 유서에서 자결의 이유를 밝혔다. “이 나라는 500년 동안 선비를 길렀다. 나라가 망해버린 지금, 이 난리를 당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다 하겠는가. 너무 원통하지 않은가? 나는 위로 하늘이 도덕을 굳게 지키시는 아름다운 뜻을 어기지 못하노라. 아래로는 평소 읽은 글의 뜻을 저버리지도 못하니라.” 오직 선비로서 도리를 다하기 위해, 그는 목숨을 끊었다. 선비란 이렇게 서슬 푸른 칼을 가슴에 품고 사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다.


선비다운 선비는 적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나라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들이 존재했다. 위에서 보았듯, 황현과 최익현은 구차하게 연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면의 가치를 버리느니 차라리 죽기를 바랐다. 참으로 장하지 않은가.


그들의 선택에 우리가 동의하지 못할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감히 가벼운 마음으로 비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나 자신이 선비가 될 수는 없어도, 차마 선비를 욕되게 하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어떠한가. 너무나 경박하다. 흠결 많은 정객들과 언론인들이 감히 의병도 능욕하고 동학농민들까지도 깎아내린다.


그사이 세월이 많이 흘러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달라지기는 하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타국의 강압에 순순히 굴복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협상의 지혜요, 큰 자랑거리가 된다는 말인가. 말끝마다 보수를 내세우고 태극기나 흔들어대는 사람들 편에 서서 도대체 무슨 가치를 옹호하겠다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사대주의와 굴종의 폐습이 아니기를 바란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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