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판도라와 이브

2016년 출간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화돼 개봉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사이 소설과 영화는 큰 사회적 반응을 불러왔다. 책을 언급하거나 추천한 여성 연예인들은 악성 댓글에 시달리기도 했고, 일부 남성들은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라고 공격했으며, 누군가는 영화를 보지도 않고 평점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그 저변에는 여성을 비하하고 때론 혐오하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여성 비하와 혐오는 역사가 너무나 오래되었고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일종의 정신적 감옥이자 구조와 같다. 이런 인식은 유럽 역사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 역사에서 부정적 여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아이콘은 판도라와 이브다.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에 따르면 인간을 좋아하는 티탄족 프로메테우스에게 속은 제우스는 그에 대한 화풀이를 인간에게 했다. 제우스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진흙으로 불사의 여신들을 닮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성을 만들라고 명했고, 모든 신들에게 그녀에게 선물을 주라고 요청했다. 아테네는 그녀에게 고운 베를 짜는 법을 가르쳤고, 아프로디테는 매력을 선물했다. 미의 여신들은 그녀의 온몸을 황금 장신구로 꾸몄고, 계절의 여신들은 봄꽃으로 만든 화환을 선물했다. 제우스는 모든 신들로부터 선물을 받은 최초의 여성 판도라를 상자와 함께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다. 제우스로부터 어떤 선물도 받지 말라는 형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에피메테우스는 미모에 반해 판도라를 받아들였다. 판도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제우스의 선물 단지를 열었고, 단지 속에서 이후 인간을 괴롭히게 될 질병, 가난, 슬픔, 증오, 전쟁 등의 모든 불행들이 뛰쳐나왔고, 희망만이 단지 바닥에 남게 되었다. 그로써 판도라는 인간 삶의 모든 불행의 원천이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가 판도라를 만들어냈다면 기독교는 이브를 창조했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흙으로 아담을,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창조했고, 이들을 동쪽의 에덴동산에 살게 했다. 신은 아담과 이브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제외하고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브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먹고, 그것을 아담에게도 주었다. 신은 명을 어긴 이들에게 벌을 내렸다. 뱀은 땅바닥을 기며 흙을 먹어야 했고, 남성들은 생존하기 위해 땀 흘려 노동해야 했고, 여성들은 출산의 고통을 겪고 자신을 다스릴 남성을 원하게 되었다. 그들은 동산에서 추방되었다.


이로부터 여성 차별과 혐오라는 긴 역사가 이어졌다. 2세기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너희는 악마의 관문이다. 너희는 그 나무의 봉인을 뜯은 자이다. 너희는 신성한 법을 처음 저버린 자이다. 너희는 악마가 용기가 없어 공격하지 못한 남성을 설득한 자이다. 너희의 저버림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도 죽어야 했다. 그런데도 너희는 피부라는 외피에 또 장식을 할 생각을 하는가?”라면서 원죄의 책임을 이브에게 돌렸다. 이렇듯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성이 속아 죄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수백년 동안 되풀이되었다. 중세 일부 신학자와 교회법학자들은 “여성은 저주의 사실상의 원인이었다” “여성은 거짓말의 기원이었기 때문이다” 등 여성에 대한 격한 비난을 쏟아냈다. 한마디로 인간이 원죄의 고통을 짊어지고 낙원에서 추방된 것은 모두 이브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브 죽이기는 여성이 남성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 중세의 위대한 교회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조차 여성은 우연히 생겨나 결함 있는 남성(vir occasionatus)이라고 말하면서 여성보다 남성이 하느님의 형상에 가깝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브가 아담보다 늦게 만들어진 것, 그녀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것, 뱀의 유혹에 먼저 넘어간 것 등은 이브의 열등함을 보여주는 근거로 거론되었다. 이에 따라 이단 재판관들은, 여성들은 영혼과 육체 모두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훨씬 쉽게 마법에 끌리고 악마와 계약을 맺고 해악의 마법 행위를 한다고 말했다.


중세 말 베네치아 출신의 인문주의자 크리스틴 드 피장은, 여성은 악에 빠지기 쉽고 세상의 모든 죄악을 모아 담는 그릇이라 외치는 수많은 성직자·신학자·철학자·시인들에 맞서 “오 주님,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릇된 신앙에 빠지지 않고서야, 당신이 그 무한한 지혜와 완벽한 선하심으로 도무지 선하지 않은 것을 만드실 수 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친히 여성을 지으시고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자질들을 갖춰주시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당신이 실수하실 수 있습니까? 그런데 다들 이렇게 여성을 고발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좀 보십시오. 저는 이런 모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15세기 한 여성의 간절한 탄식이 600년이 지난 현재에도 모두 해소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여성이 하는 말 중 절반은 사탄의 말이고, 여성이 에덴동산부터 사고를 쳐서 선악과를 따 먹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등의 여성 비하와 혐오의 이야기를 여전히 쏟아내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으며, 이러한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남종국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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