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프레임의 전환

코로나19 바이러스 덕분에 집안에 갇혀 지낸 시간이 많았다. 덕분에 옛날이야기도 다시 꺼내 읽었는데, 15세기의 문장가 강희맹이 쓴 글 하나가 내 마음에 남았다. 강희맹은 소문난 재담가여서 종일토록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주목한 것은 강희맹이 아들에게 준 일종의 가훈이었다. 어느 도둑에 관한 이야기인데 선비들이 쏟아낸 틀에 박힌 훈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곰곰 생각하면 특별한 맛이 있어서, 그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본다.


어느 곳에 도둑질을 업으로 삼은 이가 살았단다. 그것도 가업이라 생각하였던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도둑질하는 기술을 열심히 가르쳤다. 아들의 솜씨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고, 어느 날부터인가 아들은 자신의 솜씨가 아버지보다 낫다고 자부하였다.


아들의 자만심이 심히 걱정되었던지 아버지는 속으로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어느 날 밤 그는 아들을 데리고 큰 부잣집에 숨었다. 그곳에는 보물이 간직된 널찍한 광이 있었다. 아버지는 밖에서 망을 보고 아들은 광 안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보물을 쓸어 담고 있을 때 아버지는 밖에서 광 문을 잠그더니, 일부러 자물쇠를 덜그럭거리며 주인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주인이 서둘러 바깥으로 나왔는데 광에는 자물쇠가 그대로 잠겨 있었다. 안심한 주인은 곧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갔다. 광에 갇힌 도둑의 아들은 바깥으로 나올 방법이 없어 속을 태웠다. 생각 끝에 그는 손톱으로 판자를 벅벅 긁어댔다. 쥐가 광 안에서 무엇인가를 갉아대는 것처럼 작은 소동을 벌인 것이다.


주인은 광에 쥐가 들었다고 믿고, 등불을 가지고 광으로 달려갔다. 급히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연 다음, 쥐가 어디 있는지를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바로 그 순간 도둑의 아들은 재빨리 뛰쳐나왔다.


큰일 났다고 생각한 주인은 하인들을 깨워 추격전을 시작하였다. 거듭 곤경에 빠진 아들은 부잣집에 큰 연못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 주위를 맴돌다가 큰 돌멩이를 주워 연못 안으로 풍덩 던졌다. 주인집 사람들은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도둑이 연못에 뛰어든 줄 알고 횃불을 밝혀 못 안을 자세히 살폈다. 그사이 도둑의 아들은 유유히 사라졌는데, 훗날 천하제일의 큰 도둑이 되었다고 한다.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강희맹은 왜, 하필 도둑에 관한 이야기를 사랑하는 아들에게 들려주었을까. 무사히 집에 돌아온 도둑의 아들은 아버지의 처사에 항의하였다. 그러자 아버지의 대답이 제법 그럴듯하였다. “남에게 배운 기술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누구든지 자기 스스로 터득한 기술이라야 끝없이 써먹을 수 있다. 네 장래를 위해 나는 위기를 연출하였다.”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강희맹은 아들에게 조용히 타일렀다. 강씨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유명한 양반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위가 높아지면 사람은 조상의 업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 뿐만 아니라, 학문과 도덕의 가치도 잊어버리기 쉽다. 도둑의 아들이 위기 속에서 스스로 지혜를 얻었듯, 자기 아들도 스스로 몸을 낮추어 처신을 삼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처럼 곡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아직도 석연하지 않은 점이 있다. 지혜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으뜸이라는 간단한 교훈을 주려고 강희맹은 하필 도둑 이야기를 꺼냈을까. 재주 많고 경험도 풍부한 강희맹이 정말 그랬을까. 


벼슬길은 도둑질과도 비슷하다고 그가 믿었던 것은 아닐까. 이야기 속 부잣집은 국가요, 허둥대는 주인은 임금이며 하인은 대신일 수가 있다. 선비가 조정에 벼슬함은 보물을 얻는 일과도 같아서 뜻밖의 궁지에 몰리기도 한다. 어찌하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판자를 긁는 쥐처럼 연극도 하고, 연못에 돌을 던져 반대파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은 국면전환의 요령이 필요하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아들아,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려면 프레임을 바꾸어라!’ 겉으로는 도덕적 교훈처럼 꾸며놓았으나, 노련한 강희맹은 자신이 조정에서 터득한 생존전략을 은밀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일러주려 했다고 짐작한다. 오늘날에도 정치적 프레임을 둘러싸고 곳곳에서 혈투가 벌어지고 있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chonmyongd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