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홍콩보안법과 세조구제

뉴스 보도에 따르면 지난주 중국이 ‘홍콩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 162명이 만장일치로 이 법을 통과시켰고 시진핑 주석의 서명으로 곧바로 시행에 들어갔다는 내용이다. 새 법의 내용은 크게 4가지라고 전한다. 외국세력의 홍콩 내정 개입을 금지하고, 국가 정권 전복 및 테러리즘 활동을 금지하고 처벌하며, 국가안보 교육을 강화하고, 마지막으로 이를 위한 집행기관을 홍콩 내에 설치하는 것이 그것이다.

 

홍콩보안법 통과가 갑작스럽지는 않다. 2019년에도 홍콩의 ‘범죄자’를 홍콩이 아닌 중국 내륙으로 송환하여 처벌하려는 홍콩 송환법이 추진되었다. 홍콩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입법이 좌절되었지만 중국 당국은 송환법을 추진했던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홍콩보안법은 홍콩에 대한 중국 당국의 일관된 입장과 의지를 보여준다.

 

홍콩보안법은 이제까지 중국이 자국의 일부라고 주장한 나라들에 대해 스스로 천명했던 ‘일국양제(一國兩制)’ 원칙과 상충한다. ‘일국양제’란 글자 그대로 1개 국가이되 2개의 체제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제까지 중국은 일국양제를 통해 중국과 다르게 운영되었던 홍콩의 경제와 정치의 독립성을 인정했다. 홍콩보안법은 그것에 대한 부정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이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외국은 중국이다.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많은 우수한 문화를 수입한 것이 사실이고, 동시에 많은 침략을 당한 것도 사실이다. 중국 왕조들은 늘 주위 국가들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 영향을 가장 오래 경험한 나라가 한국일 것이다. 중국 왕조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강력하게 한국에 영향을 끼쳤던 왕조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일 것이다.

 

1231년 8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259년 고려가 태자를 몽골에 보내 항복의사를 밝힐 때까지 이어졌다. 무려 28년간의 전쟁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제국인 원나라에도 예외적인 경우였다.

몽골은 칭기즈칸 이래, 복속된 나라들에 대해 충성의 의미로 6가지 의무를 요구했다. 이를 ‘6事’라 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납질(納質)’은 복속된 나라의 왕족과 지배층 자제를 원나라에 인질로 보내는 것이다. ‘공호수적(供戶數籍)’은 호구(인구) 조사를 해 보고하는 것이다. 이는 복속국에 대한 징세와 징병 자료로 활용되었다. ‘설역(設驛)’은 역참(驛站)을 설치하는 것이다. 몽골과 복속된 나라의 교통을 위한 것이다. ‘조군(助軍)’은 군대를 보내 몽골의 전쟁을 돕는 것이다. ‘수량(輸糧)’은 식량을 운송하여 지원하는 것이다. ‘치다루가치(置達魯花赤)’는 다루가치를 복속된 나라에 설치하는 것이다. 다루가치는 원나라가 복속된 국가에 설치하는 행정기구였다. 일제강점기 총독부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30년 가까운 전쟁 끝에 마침내 고려는 태자를 원나라에 보내 항복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원나라에 간 태자는 뜻밖의 상황을 만났다. 당시 원나라 카안이 전쟁 지휘 중에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후계자가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태자는 누구에게 항복의사를 밝혀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다음 카안 자리를 두고 두 사람이 경쟁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쿠빌라이 세조였다. 그런데 당시 그는 후계자 경쟁에서 동생에게 밀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고려 태자는 쿠빌라이에게 항복의사를 밝혔고, 이는 쿠빌라이의 경쟁의 명분을 높여주었다. 그 결과 고려는 유리한 조건으로 원나라와 항복협상을 맺을 수 있었다.

 

고려 역시 원칙적으로 6사의 의무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태자는 세조에게서 매우 중요한 양보를 얻어냈다. 세조가 ‘不改土風’의 원칙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원나라가 ‘土風’, 즉 고려의 풍속은 인정하고 몽골의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향후 이 원칙은 매우 포괄적으로 해석되어 고려의 종묘와 사직, 즉 왕조체제의 존속을 보장받는 근거가 되었다. 세조구제(世祖舊制)란 세조가 약속했던 제도라는 뜻이고 압축하면 바로 ‘불개토풍’이다. 700년 전 원나라와 지금 중국이 겹쳐 보인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