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화랑도

아버지를 이어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신라 문무왕은 681년 56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열왕 김춘추이고, 어머니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이다. 뒤이어 문무왕의 맏아들 신문왕이 즉위했다. 그런데 신문왕 즉위 후 약 한 달 만에 <삼국사기>에 의미심장한 기사가 등장한다. “소판 흠돌(欽突),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는 기록이다. 


흠돌, 흥원, 진공 등은 단순한 고위 관료들이 아니었다. 흠돌은 김유신의 딸 진광(晉光)의 남편, 즉 김유신의 사위였고,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이들이 제거된 후 신라 최고위 관직인 상대등과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兵部令)을 겸하고 있던 김군관(金軍官)도 아들과 함께 자결을 명령받았다. 김흠돌 무리의 움직임을 미리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김흠돌 사건’에 관련돼 목숨을 잃은 이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상당수가 화랑(花郞)을 지냈다는 점이다. 흠돌, 진공, 김군관은 화랑이었다. 사실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도 그들에 앞서 화랑이었다. ‘김흠돌 사건’은 어찌 보면 신라의 최고위층이 내부적으로 진행한 최후의 통일전쟁이었다. 고구려, 백제, 당나라 등 외부의 적들을 모두 제거한 후 잠재적인 내부의 적을 제거한 게 바로 ‘김흠돌 사건’이다. 동시에 이 사건은 신라사회가 오랫동안 이어온 화랑제도와 골품제도의 공존이 마침내 끝났음을 뜻했다. 두 제도의 구성 원리는 크게 달랐다. 화랑도가 신분을 넘어선 수평적 연대라면, 골품제는 신분에 기초한 수직적 국가체제였다. 강력한 외부의 적들에 대항하기 위해 두 제도의 공존이 필요했다면, 통일된 마당에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통일 이후 화랑도는 변질되었다.


화랑의 무리들은 본래 무사적 집단은 아니었다. 그들은 보통 화랑 한 명에 수백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낭도로 구성되었다. 화랑은 용모가 단정하고 사교성이 풍부한 진골귀족 가운데 낭도들의 추대로 뽑혔다. 화랑은 ‘꽃처럼 아름다운 젊은 남성’이라는 뜻이다. 풍월주(風月主), 선랑(仙郎) 등이 또 다른 이름이다. 신라가 귀족사회였고, 다수의 낭도를 거느리려면 막대한 경비가 들었기에 이들이 대개 진골귀족에서 추대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낭도이다. 진골귀족부터 평민 자제까지 모두 낭도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들은 대개 15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이었다.


인류학 연구에 따르면 화랑 같은 집단은 신라에만 있지 않다. 백제나 고구려는 물론이고 다른 문명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무리들이 발견된다. 일정한 연령에 도달한 마을 젊은이들이 비밀결사를 만들고 일종의 공동생활을 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는 함께 국토순례를 했고, 신령한 산에서 공동으로 수련을 했다. 그런데 역시 인류학 연구에 따르면 이런 조직은 대개 수직적인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라는 그들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멸하도록 두지 않았다.


신라는 6세기 중엽 진흥왕 때 급격히 국가체제를 갖췄다. 내부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갖췄고, 외부적으로 영토 팽창을 거듭했다. 중앙집권체제 확립은 전 국민을 신분적으로 구분하는 골품제의 강화를 뜻했다. 이는 계층 간 알력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또 영토 팽창은 백제, 고구려와의 군사적 갈등을 초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화랑도는 신라가 안팎으로 맞은 갈등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화랑제도는 한 명의 화랑과 그를 ‘자발적으로’ 따르는 낭도로 구성되었다. 15세에서 18세 사이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막 의식하기 시작하는 나이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 우정을 나눌 수도 있는 나이이다. 같은 화랑을 따르는 낭도들 사이에는 그런 우정이 가능했다. 그들의 우정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어느 정도 이어졌다. 화랑의 무리들은 점차 계층화되는 사회에서 그것을 넘는 연대를 가능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진흥왕대에 화랑제도는 그 성격이 크게 변화했다. 무엇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을 앞세우는 무사적 집단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백제, 고구려에 군사적으로 맞서야 했던 신라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자립형사립고 승인 문제가 사회적 이슈이다. 이름은 다르지만 소위 일류대 합격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다른 이름의 학교들도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경제적 뒷받침이 가능한 부모가 자녀의 학업성적이 좋을 때 이들 학교에 보내려는 것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사회정책적으로 타당하다는 말이 아니다. 사회가 그냥 흘러가도록 놔두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이 과정을 거쳐 교육제도가 일단 불평등해지면 사회는 이전과 정도가 다르게 계층화되게 마련이다. 사실은 그것이 사회 그 자체가 늙어가는 과정의 핵심 내용이다. 역사상 많은 위대한 사회가 그렇게 노화되고 쇠퇴하고 결국 소멸했다.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늙는 것처럼, 흥미롭게도 사회도 그런 측면이 있다. 사회 노화의 핵심이 바로 구성원 간 불평등의 심화이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의 노화 사이에는 다른 점도 있다. 개인의 노화는 막을 수 없지만, 사회의 노화는 늦출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아직 늙기엔 너무 이르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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