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16세기 베네치아의 위기와 기회

1492년 바스쿠 다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선단이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유럽에서 제일 먼저 전해들은 곳은 베네치아였다. 이 소식은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지중해를 경유하지 않고 향신료의 원산지로 직접 가는 새로운 항로의 개척은 베네치아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이었다. 중계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 왔던 베네치아 공화국 천년의 역사에서 최고 위기의 순간이었다. 베네치아에는 부정적인 전망이 넘쳐났다. 한 베네치아 연대기 작가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베네치아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건은 없을 것이라며, 이 소식이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유럽 전역에서도 비관론이 우세했다. 16세기 초 인도양을 여행했던 포르투갈 출신 상인 토메 피레스는 말라카의 주인이 되는 자가 베네치아의 숨통을 끊을 수 있다고 기대를 했다.


하지만 당시 베네치아가 겪고 있었던 위기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베네치아가 동지중해에서 갖고 있던 여러 식민지 영토들을 하나씩 오스만 제국에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중해에서 과거의 해상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할 기미가 없어 보였다. 물론 베네치아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 16세기 지중해 역사를 다룬 <지중해: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의 저자인 페르낭 브로델은 오스만과 베네치아의 싸움을 곰과 말벌의 싸움에 비유하며 기껏해야 말벌인 베네치아가 거대한 곰인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300년이나 버텨낸 것은 실로 경탄할 만한 저항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설상가상으로 16세기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본토에서도 열강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 제국과 캉브레 동맹을 결성해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베네치아의 성장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는 열강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작은 섬나라 베네치아를 집어삼키기 위해 당시 유럽의 최고 열강들이 연합했다. 언뜻 보기에 이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당시 마키아벨리는 베네치아가 이 한 번의 전쟁으로 그들이 800년 동안 쌓아 올린 것을 모두 잃어버릴 것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 초기 큰 패배로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던 베네치아는 다소 시일이 걸렸지만 빼앗겼던 북부 이탈리아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고 그 후로도 300년 가까이 독립을 유지했다.


1500년경 베네치아가 직면했던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위기들을 고려하면 16세기 베네치아의 미래는 암울하거나 희망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베네치아는 주변 강대국들의 공세를 막아낸 것처럼 경제적 위기에도 신속하게 대응했다. 우선 포르투갈의 인도 항로 개척으로 야기된 향신료 무역의 위기를 타개하려고 통상 5인 위원회(cinque savi alla mercanzia)라는 기구를 설립했다. 최종적으로 포르투갈이 개척한 인도 항로는 지중해를 통과하는 베네치아의 향신료 교역을 완전히 붕괴시키지 못했다. 16세기 중엽에는 이전의 최고 전성기 수준 이상의 향신료가 베네치아로 수입되었다. 베네치아는 인도 항로 개척 이후에도 한 세기 이상 잘 버텼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베네치아의 또 다른 대응은 경제 구조의 다변화였다. 기존에 베네치아는 지중해를 통한 상품 수송과 교역에 집중했었고 조선업 이외의 산업 활동은 미미했었다. 이러한 경제 구조는 그만큼 지중해 교역에서 막대한 부를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인도 항로 개척은 이러한 경제 구조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베네치아는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던 여러 직물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여타 이탈리아 도시에 있는 숙련된 직물 장인들을 베네치아로 유치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6세기 초 연간 2000필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모직물 산업이 16세기 후반에는 3만필을 생산할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모직 산업 다음으로 견직 산업과 면직 산업도 크게 번성했다. 비누와 유리 산업의 성장도 직물 산업 못지않았다. 16세기 베네치아 유리 산업은 전성기를 맞았고 베네치아 유리 세공품들은 유럽뿐만 아니라 이슬람 세계에서도 큰 명성을 얻었다. 16세기 베네치아를 대표할 또 다른 산업은 출판산업이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개발한 독일의 마인츠가 아니라 베네치아가 16세기 유럽 인쇄업의 메카로 부상했다. 적극적인 숙련 장인 유치, 종교적 박해와 검열로부터의 상대적 자유, 베네치아 상인이 보유하고 있는 광범위한 유통망, 책을 쓸 수 있는 다수의 지식인이 베네치아에 있다는 점 등이 베네치아가 인쇄업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16세기 베네치아의 인구는 증가했고, 경제 성적표 또한 우수했다. 경제적 지표로 본다면 16세기 말 베네치아 경제는 최고 전성기에 있었다. 베네치아의 속담처럼 사면초가였던 16세기의 베네치아는 부서지기는 했지만 결코 몰락하지 않았다. 한국 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된 아베 정권의 경제 공격은 한국경제에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16세기 베네치아가 위기를 극복하고 크게 도약했듯이 우리에게도 위기는 변화와 혁신의 기회이기도 하다.


<남종국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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