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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미 국무장관 ‘애치슨 라인’ 발표

KHAN으로 보는 역사 2011. 1. 12. 09:48

심은령기자

ㆍ미국, 한국의 안보 불개입 선언

1949년 9월 소련이 원폭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원자무기 독점시대가 끝났고, 10월에는 중국이 공산화됨에 따라 냉전은 더욱 골이 깊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외교문제를 책임진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1950년 1월12일 워싱턴 내셔널클럽에서 열린 ‘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하고 일본을 포함한 알류산 열도로부터 필리핀까지가 미국의 방위선”이라는 일명 ‘애치슨 라인’을 처음 언급한다.



구체적으로는 소련·중국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발표했다.

애치슨은 “미국은 아시아 본토를 방위할 의무가 없다”며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 그리고 류큐(현 오키나와) 열도와 필리핀에 이르는 방위선 안의 본질적 부분은 미국이 방위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방위선 밖은 자위(自衛)와 유엔에 의존해야 할 것”이라고 밝히며, 미국의 의무에는 한계가 있음을 강조했다. 요컨대 이 방위선 밖의 한국, 대만의 안보는 국제연합의 책임 아래 둘 뿐 미국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미 정부에 선언 취소를 강력히 요구했지만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 ‘불후퇴 방위선’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결정적 원인 중 하나로 지목받았다. 애치슨 선언이 6·25전쟁 발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북한이 전쟁 실행을 구체적으로 결정한 것이 1949년 말이므로 전쟁 발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견해와 북한의 전쟁 수행 지원에 머뭇거리던 스탈린이 남한의 공산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은 애치슨 선언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북한과 소련에 잘못된 시그널을 주었다는 것이다. 한편 일부 학자는 이 연설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고도의 음모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통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지 못한 미국의 결정적 실책이라고 보았다.

애치슨은 평생 동안 계속된 비난으로 1971년 10월12일 세상을 떠나면서 “불행한 역사의 나라 한국에 ‘불안한 침묵’이 퍼져가고 있으며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1990년대 이후 힘겹게 쌓아 올린 남북 화해의 가능성은 최근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등으로 급속히 경색됐다. 신냉전의 시대, 전쟁의 기억은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