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 ‘초원복집’ 김기춘씨 소환
14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1992년 12월18일 경향신문은 사회면에 ‘김기춘씨 등 21일 소환’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부산지역 기관장의 민자당 김영삼 후보 지지모임을 수사 중인 서울지검 공안1부는 17일 대통령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6명 중 김기춘 전 법무장관등 4명을 21일 소환 조사키로 했다. … 검찰은 이 모임 참석자와 모임이 있었던 ‘부산초원복국집’ 주인에 대해서도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 조사를 벌일 방침이다.”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의 수사를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초원복집 사건이란 대선을 일주일 앞둔 12월11일 부산 초원복집에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모여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를 당선시키자고 모의한 사건이다. 뒷날 유행했던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이 자리에서 나왔다.
사건 모의를 주도한 김기춘씨에 대한 검찰 수사에 이목이 집중됐다. 거제 태생에 부산 경남고 출신인 그는 선거 두 달 전까지 법무장관을 지내 ‘노골적인 선거 지원’이라는 비난이 고조되던 터였다. 그러나 김영삼 후보의 당선으로 수사는 흐지부지됐다. 검찰이 김기춘씨를 불구속 기소하자 김씨는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도록 한 현행 대선법은 평등권 위반”이라며 위헌제청신청을 냈다. 검찰총장, 법무장관을 역임한 ‘법률 전문가’의 반격이었다. 김영삼 정권에서 면죄부를 받은 김기춘씨는 이후 승승장구했다. 1994년 민자당 국책자문위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거물급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의원 시절 김씨는 극우보수적인 행보로 논란을 일으켰다. 노무현 정권을 친북 좌파 정권으로 매도하며 노 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하기도 했다.
‘문제적 정치인’ 김기춘씨가 지난 6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기용됐다. 그가 70대 중반의 고령에도 중용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원로 측근그룹인 7인회의 멤버인 데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검사로서 유신헌법 제정에 관여하고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수사에 참여한 인연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당 내에서조차 민주주의를 훼손한 초원복집 사건의 장본인이 중용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옛날 카드’를 꺼내드는 청와대의 인사 시스템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