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성인 세바스티아누스와 흑사병

유럽 역사에서 르네상스 시대라 불리는 14~16세기에는 엄청난 양의 미술작품이 제작되었다. 그림의 양도 증가했고 새로운 소재들을 다루었지만 여전히 기독교와 관련된 주제가 대다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인기를 얻은 기독교 성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성인 세바스티아누스였다. 페루지노, 틴토레토, 티치아노, 안드레아 만테냐 등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다수 화가들이 그를 화폭에 담았다. 대체로 성인 세바스티아누스는 화살을 맞고도 얼굴에 고통보다는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특히 만테냐가 그린 성인 세바스티아누스는 근육질의 몸매에 온몸에는 10개 정도의 화살이 꽂혀 있고 게다가 머리를 관통한 긴 화살을 품고 있다.  


세바스티아누스는 3세기 후반 로마 제국의 황실근위대 장교였다. 288년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을 당시 기독교 신자임을 들킨 세바스티아누스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4세기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전언에 따르면 나무 기둥에 묶인 세바스티아누스는 몸에 화살을 맞았지만 죽지 않고 살아났다. 이레나 성녀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건강을 회복한 세바스티아누스는 다시 황제에게 찾아가 황제의 죄를 꾸짖다가 최종적으로 곤봉을 맞고 처형당했다.


르네상스 시기 세바스티아누스가 화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모방하려 했고 특히 육체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 덕분에 중세 유럽 사회에서 거의 제작되지 못했던 누드가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성인들을 벗은 모습으로 그린다는 것은 여전히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기독교 초기부터 반 누드의 모습으로 그릴 수 있었던 드문 대상은 아담과 세바스티아누스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반 누드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성인과 다르게 군인이라서 건장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해도 크게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성인 세바스티아누스는 중요한 부분만 약간의 천으로 가린 채 몸에 여러 대의 화살을 맞고 약간 몽환적인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때론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졌다. 


세바스티아누스는 일반인들에게도 인기를 얻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흑사병 때문이었다. 14세기 중엽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다. 흑사병에 대한 공포와 의학적 무지는 흑사병을 초자연적 현상으로 설명하게 만들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흑사병이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신이 내린 징벌이라고 생각했다. 죄를 뉘우치기 위해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가장 극단적으로는 온몸에 채찍질을 하면서 여러 지역을 순회하는 채찍질 고행 행렬이 줄을 이었다.  


흑사병과 성인 세바스티아누스를 연결해준 핵심 고리는 바로 화살이었다. 천상의 신이 내린 흑사병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처럼 보였고, 온몸에 화살을 맞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성인 세바스티아누스는 흑사병을 물리쳐주는 수호성인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흑사병, 화살, 성인 세바스티아누스는 르네상스 시대 회화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팔레르모에 있는 ‘죽음의 승리’(1446년경 제작)라는 그림에서는 해골이 뼈만 앙상한 말을 타고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화살을 날리고 있다. 15세기 말 프랑스 화가 조스 리페랭스가 그린 ‘역병 희생자를 위해 탄원하는 성인 세바스티아누스’의 아랫부분에는 역병으로 사망한 사람을 흰 천으로 싸서 옮기고 있고 그 과정에 다시 사람이 쓰러져 죽는 참혹한 광경이 보인다. 그림의 윗부분, 즉 천상에서는 몸에 10개 이상의 화살을 맞은 성인 세바스티아누스가 하느님께 두 손을 모아 간절히 탄원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가서야 흑사병이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라는 박테리아가 검은 쥐와 같은 설치류에 서식하는 벼룩을 통해 인간에게 감염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19세기까지도 숱한 목숨을 앗아간 결핵은 낭만주의 소설에서 천한 육체를 분해해 고상한 인격을 완성하는 수단으로 미화되기도 했지만 무모하고 육감적인 사람들이 열정을 해소하지 못해 생긴 병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프란츠 카프카는 1917년 평생의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핵은 그다지 특별한 질병도 아니고 특별한 이름으로 불릴 만한 질병도 아니며, 그저 죽음 자체를 좀 더 재촉하는 세균일 뿐이라고 말했다. 수전 손택은 자신의 책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을 신의 징벌이나 도덕적 타락의 결과로 바라보는 오래된 인식에서 벗어나자고 조언했다. 어쨌든 전염병에 대한 무지와 그로 인한 편견이 사라지게 된 것은 의학이 발달하면서이다. 이제 전염병을 신의 징벌이나 도덕적 타락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현대인은 더 이상 성인 세바스티아누스를 보며 병의 치유를 바라지 않으며 세바스티아누스에 대한 기억도 그와 더불어 희미해졌다. 이제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이도 드물다. 오직 역사만이 흑사병 시대의 간절한 염원을 기억할 뿐이다.


<남종국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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