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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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공정성이야” 정말 이상했다. 국정조사 청문회를 통해 국회의원들은 몇 번이나 기업인들에게 확인을 받으려 했다. ‘앞으로 더 이상 정경유착의 비리를 저지르지 않으실 거죠?’ ‘그렇게 안 하실 거라고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런데 기업인들 중 누구도 시원하게 ‘네’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과거에 대해서 반성하고 있다는 답변이 다였다. 그들은 1950년대부터 지속되어 온 정경유착의 교훈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한 연구자는 1970년대 한국과 필리핀을 비교 연구했다. 당시 두 나라는 모두 ‘부패’로 유명한 독재국가였다. 그런데 한 나라는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뤘고, 다른 한 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연구자가 주목한 것은 한국에서의 부패는 단순한 부패가 아니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
진정한 비정상의 정상화 한국 민족은 35년 동안 식민지를 겪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39년간 독재 치하에 있었다. 이 기간에 한민족 구성원들은 숱한 고난과 치욕을 받으며 살아야 했고, 인권과 자유는 단지 사치에 불과했다. 이 기간에 다른 한편으로 일부 사람들은 큰 이득을 보기도 했고, 불법적 권력의 편에 서서 가해자가 되기도 했다. 불법적 합방조약으로 수립된 권력, 민주적 선거가 아닌 관권 선거와 쿠데타로 쟁탈한 권력은 사회의 모든 방면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고, 이 과정에서 수혜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불법적 권력의 ‘분할하여 지배하라(divide and rule)’는 원칙은 수혜자와 피해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46년, 그리고 민주화로부터 4년이 지난 후인 1991..
시민항쟁 끝은 ‘실질적 사회 변화’ 일반적으로 유교적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지금도 강한 정부가 존재하고 있다. 유교의 본산인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베트남, 싱가포르, 대만 등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많은 약소국들 역시 동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독재정부를 경험했다. 한편으로는 국민들이 빠르고 효율적인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위해 강력한 지도자와 정부를 원했기 때문이었고,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민주주의적 정치 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체제 역시 독재정부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냉전체제에 균열이 나타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들은 더 이상 독재를 참지 못했고, 국민의 힘에 의해 정부가 교체되는 혁명과 봉기를 경험했다. 베트남에서 시작된 국민의 힘은 이란을 거..
‘분단’의 정치적 이용, 이제 그만 지난 25년간 한국현대사 강의를 하면서 항상 그 시작은 ‘분단’이었다. 우리는 왜 분단됐는가? 왜 우리가 분단됐어야 했는가? 우리는 왜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 세 질문은 한국현대사 강의의 시작부터 끝을 관통하는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 유럽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가 분단되거나 분할 점령되었다.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벌칙이었다. 아시아의 경우는 달랐다. 전범국은커녕 오히려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거나 전범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분단되었다. 게다가 얼어붙은 냉전의 시대에 열전을 겪어야 했다.한반도는 분단이라는 숙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분할 점령 이후 70년이 지났고, 오스트리아도, 베트남도, 독일도 분단으로부터 벗어났지만, 한반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
인사 폐단의 계보 나라를 다스리든, 회사를 운영하든, 아니면 집안 살림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이 인사(人事)다. 지도자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성인들은 곡목구곡목(曲木求曲木)이나 무사인사(無私人事), 그리고 부득이(不得已) 같은 고사성어를 통해 공정하고 적절한 인사의 원칙을 강조했다. 민주화 이후 국민들은 독재정권하에서의 학연, 지연 등 친소관계에 의한 인사제도의 개혁을 희망했다.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공정한 인사를 통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독재정부의 특징 중 하나는 인사 전횡이기 때문이다. 독재정부 시절 어떠한 인사과정도 투명하지 않았다. 쿠데타 직후에는 공정한 것처럼 보였다.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잡게 된 지도자들..
이승만과 건국절 논쟁 국가나 정부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것이 연도 표기 방식이다. 태국은 부처의 탄생에서, 서구 유럽은 예수의 탄생에서 연도의 기준을 잡음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적인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중심의 질서가 오랫동안 계속됐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연호를 함께 사용했다. 그러다가 화이질서가 무너지면서 각국은 자기 스스로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창건 후 500년 동안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다가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 직후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광무라는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조공외교 질서에 포함되지 않는 독자적 국가임을 선언한 것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조선은 일본의 연호를 써야만 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왕이 취임한 해..
전쟁에 대한 기억과 교훈 미국에서 열린 ‘현대 전쟁의 기원’이라는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전쟁과 관련된 최신 연구들을 바탕으로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를 연구하는 세미나였다. 연구의 초점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맞추어져 있었지만, 세미나에 참여한 교수와 학생들은 제각기 다른 전쟁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세미나의 핵심적인 토론 내용은 기존의 전문가들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다보니 진정한 전쟁의 원인을 찾기 어려웠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적 또는 경제적 위기가 있을 때 어떤 경우에는 그 위기가 전쟁이나 혁명으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전쟁이나 혁명 없이 해결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위기가 왔을 때 지도자나 사회 구성원이 선호하는 위기 해결 방식에 따라 전쟁이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
선거와 역사 흐름의 순방향 4·13 총선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총선 당일까지도 대부분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집권여당의 일방적 승리를 예측했다. 과반뿐 아니라 개헌이 가능한 3분의 2 이상의 의석도 가능할 것 같아 보였다. 무엇보다도 야당의 분당으로 인한 어부지리가 크게 작용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아니 전문가들과 언론의 예측은 완전히 틀렸다. 4대강 사업으로 국가 재정이 고갈되고 정권의 사유화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세월호 참사로 300명 넘게 희생되었음에도 총선과 대선, 지방선거에서 집권여당의 손을 들어주었던 선거 결과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문제는 그들을 전문가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언론도 민의를 정확히 반영하는 진정한 언론이 아니었다. 1958년 5월2일 치러진 제4대 총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