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광주극장과 원주 아카데미극장

원주 옛 아카데미극장의 매표구.

서울 종로3가의 서울극장이 8월31일 문을 닫는다고 한다. 얼마 전 그곳에서 <자산어보>를 보았는데…. 서울극장 폐관 소식을 듣고 광주 충장로에 있는 광주극장이 떠올랐다. 1935년 문을 연 광주극장. 당시 ‘조선 제일의 대극장’이란 찬사를 받으며 호남지역 대표 극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 1968년 화재로 극장이 모두 타버렸고 다시 건물을 지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난주 광주극장을 다녀왔다. 4년 만이었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3층짜리 건물에 스크린은 여전히 하나. 임검석(臨檢席)도 그대로였고 1950~1960년대 사용했던 대형 영사기 2대도 건재했다.

 

그런데 전에 없던 자그마한 전시공간이 눈길을 끌었다. ‘만축(滿祝)’이란 글씨가 인쇄된 흰 봉투, 여성 아나운서의 영화 안내 멘트를 적어놓은 노트, 영화 티켓에 찍었던 각종 도장들, 오래된 초대권…. 객석 매진 시 ‘만축 봉투’에 사례금을 담아 관객들에게 선물했다는 사실이 특히 흥미로웠다. 그 봉투가 행운의 부적처럼 보였다. 영화 상영 직전에 아나운서가 영화 내용을 직접 안내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극장 복도에 걸려 있는 사진들도 다시 한번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1955년 간판 작업실 모습, 1970년대 출입구에서 기도 보는 청년들의 모습, 영화 개봉을 기념해 광주극장을 찾은 배우 복혜숙과 전태이의 모습 등. 광주극장 곳곳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박물관이었다.

 

대기업 복합상영관이 영화관을 지배하는 시대에 단관극장의 존재는 기적 같은 일이다. 광주극장도 위기가 많았지만 2016년부터 후원 회원제를 도입해 독립영화 공간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역공동체 영화관인 셈이다. 시민들이 함께 그려 외벽에 걸어놓은 영화 간판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강원 원주에 가면 옛 아카데미극장이 있다. 이 극장은 1963년 문을 열었다. 1950~1960년대 원주 도심에는 원주극장, 군인극장, 시공관, 문화극장, 아카데미극장이 들어섰다. 이 단관극장들은 오랜 세월 원주의 명물이었다. 그러나 2005년 복합상영관이 생기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이듬해인 2006년 단관극장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아카데미극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후 극장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다행스럽게 아카데미극장 건물은 헐리지 않았다. 그러나 건물 소유주가 창고처럼 사용하면서 영화관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2016년 무렵 원주시민들은 아카데미극장의 존재를 되새기기 시작했다. 일부 훼손되었지만 객석, 영사실, 매표구, 간판거치대, 광고판 등 기본적인 시설은 잘 남아 있었다. 시민들은 뜻을 모았다. 지난해 11월 소유주의 동의를 얻어 내부를 정리하고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원주시도 극장 건물을 매입해 보존·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진척은 더뎌 보인다. 건물 매입은 아직 계획일 뿐, 예산 확보의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 머뭇머뭇하는 사이, 어느 순간 극장 건물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옛 건물을 헐어내고 고층 빌딩을 올리고 싶어하는 우리네 욕망. 2005년 등록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순식간에 철거된 서울의 스카라극장이 떠오른다.

 

아카데미극장 2층 발코니엔 철제 간판거치대가 있다. 녹이 많이 슬었지만 아직도 쓸 만한데 거기 영화 간판이나 현수막은 언제쯤 내걸릴 수 있을까. 출입구 옆 매표구는 언제 보아도 매력적이다. 오래된 타일에 인조석 물씻기로 마감한 외벽, 글자 몇 개 떨어져 나간 요금표, 아크릴판 아래쪽에 뚫려 있는 반원 모양의 구멍. 매표구 하나만으로도 단관극장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한 시대 삶의 흔적이 밀려오는 듯하다.

 

며칠 전 원주 아카데미극장을 찾았을 때, 텅 빈 매표구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조조할인, 어른 두 명이요!”


이광표 서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