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조선 시대 장관 임명 논란

선조 14년 병조 참판 윤의중(1524~1590)이라는 인물이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차관에 있다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그러자 조정 언론을 담당하는 사헌부·사간원에서 반대 상소가 올라왔다. 내용은 이랬다. “윤의중은 해남의 미약한 가문 출신인데 처음 관직에 나왔을 때는 뛰어난 인재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직과 명예로운 직책을 차례로 역임하여 참판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평생 치부에만 힘써서 그 부(富)가 호남에서 제일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탐욕스럽고 비루하다고 생각합니다.”

윤의중 경력은 상소에 쓰인 대로였다. 그는 25세인 명종 3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상당히 이른 합격이다. 32세에는 사가독서를 했고, 이어 이조 정랑에 올랐다. 사가독서는 엘리트 문관 관료들 중 소수를 선발하여, 휴가를 주어 공부를 시키는 제도였다.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는 것으로 그가 촉망받는 엘리트 관료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조 정랑은 비록 5품이지만 인사에 대한 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였다. 이후에도 형조, 이조, 병조 참의와 도승지를 지내며 승진을 이어갔다. 참의는 차관 다음 자리이고, 도승지는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이다.

선조가 즉위하며 정치적으로 긴 세월 탄압받았던 사림이 집권했다. 그러자 명종 대에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이들이 도덕적으로 비판받고 정치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윤의중 역시 그 범주에 속했다. 하지만 그의 승진은 계속되었다. 선조 즉위 후 그는 호조 참판, 평안 감사, 병조 참판, 대사헌, 대사간을 지냈다. 비교적 능력이 있고, 정치적 색채가 짙어 보이지 않으면서도 늘 주류 쪽에 섰던 처신 덕분이었을 것이다.

윤의중이 관여된 수뢰사건이 선조 11년에 터졌다. 사헌부는 그가 뇌물을 받은 증거가 드러났는데도, 조사해서 죄를 물으라는 임금의 명령을 면한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상소했다. 그러자 선조는 민간의 관행을 따르다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실수로 보아서 용서한다는, 정말로 자비로운 결정을 내렸다. 그는 선조와 관계도 좋았던 듯하다. 이어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상소는 이 선에서 매듭지어진 모양이다.

선조 14년에 윤의중이 형조 판서에 임명된 것은 사실 그의 외조카 이발의 힘이었다. 이발은 당시 조정의 주류 정치세력 동인의 영수였다. 애초에 윤의중이 1순위가 아니었지만, 인사 담당자 중 하나가 이발에게 잘 보이려고 윤의중을 1순위로 강력히 밀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 이발의 눈치를 보지 않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율곡 이이였다. 사실 후배 이발을 발탁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이이는 이발의 인간적 수준을 믿었기에 윤의중 비판에 주저함이 없었다. 이발이 공사가 분명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이이의 의사가 반영된 사간원 상소는 이랬다. “윤의중은 청렴치 못한 짓으로 부를 이루어 본시 청의(淸議)가 비루하게 여기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을 승진시키면 세상 사람들에게 사익만 취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됩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이후로 이이가 이발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 나온다.

윤의중의 손자가 윤선도이다. 그는 유명한 해남윤씨 집안사람이다. 윤선도 대에 가문의 부는 유명했다. 위 상소에서 윤의중이 해남의 미약한 가문 출신이라 말했던 것으로 보아서, 집안의 부가 윤의중 당대에 기반을 잡았다고 봐야 할 듯하다. 공무원이 아니라면 치부가 문제 될 리 없다. 공적으로만 쓰여야 할 정보, 지위 등 자원을 개인 치부에 사용한 것이 문제이다.

새 정부 각료 임명 절차가 한창이다. “이런 사람을 승진시킨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사익만 취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됩니다”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평생 사익 위주로 산 사람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공익 위주로 살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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