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1970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 분신

‘아름다운 청년.’ 그의 이름 석자 앞에 붙는 수식어다. 영화감독 박광수가 1995년 국민모금 방식을 통해 제작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개봉되고 나면서부터다. 전태일 열사(1948~1970).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그는 1970년 11월13일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하며 숨졌다.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 있는 봉제공장 골방에서 하루 15~16시간 일한 지 5년 만이었다. 그가 살인적인 노동을 이겨냈던 평화시장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평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는 수없이 읽어 너덜너덜해진 <근로기준법 해설>을 가슴에 안고 분신사망했다.

 

 

(경향DB)

 

전태일 열사가 생을 마감하기 37일 전인 1970년 10월7일 경향신문 사회면에는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한 국내 언론 사상 최초의 보도였다. 경향신문은 이 기사에서 “높이가 1.6m밖에 안돼 허리도 펼 수 없는 2평 남짓한 작업장. 먼지 가득한 그곳에 15명 정도씩 몰아넣고 종일 일을 시켜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있는 어린 소녀들. 건강검진은커녕 근로기준법에 담긴 노동자의 기본 권리도 박탈당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 기사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펴낸 <전태일 평전>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경향신문사 앞에서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전태일은 새로 나온 석간신문 한 장을 들고 미친 듯이 평화시장을 달렸다.”

 

경향신문 보도 이후에도 노동환경이 개선될 조짐이 보이자 않자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곤 했다. 경향신문 1970년 11월14일자 7면에는 ‘혹사 등 항의 분신…평화시장 재단사, 병원서 숨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전태일 열사의 사망을 알린 기사였다. 그의 작은 몸을 태운 불씨는 이 땅의 수백만 노동자들에게 번져갔고, 노동운동의 불꽃을 타오르게 했다.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뜬 지 43년이 흐른 지금에도 노동해방은 요원하기만 하다. 지난달 31일에는 충남 천안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서 수리기사로 일해온 최종범씨가 카카오톡에 ‘전태일님처럼 그러진(분신하진) 못해도 선택했어요’라는 글을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이 얼마나 이어져야 ‘노동해방의 새벽’이 밝아오는 것일까.

 

박구재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