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삼일절에 생각하는 징비(懲毖)

“<징비록(懲毖錄)>이란 무엇인가. 임진란 후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그 가운데 전란 전의 일도 간혹 기록한 것은 그 발단을 밝히기 위해서다. 임진년의 재앙은 참혹했다. 수십일 동안 세 도읍이 함락되고, 온 나라가 무너졌다.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피란했다. 그러고도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하늘 덕분이다….”

서애 유성룡(1542~1607)은 왜 <징비록>을 썼나? ‘징비(懲毖)’였다. ‘징전비후(懲前毖後)’, 즉 “지난 잘못을 거울 삼아 후일을 조심한다”는 취지다. <시경(詩經)>의 소비(小毖) 편에 나온 구절(予其懲而毖後患)에서 연유한 것이다.

<징비록> 본문의 시작 부분에는 보한재 신숙주(1417~1475)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죽음을 앞둔 신숙주에게 임금 성종이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없소?” 신숙주가 대답했다. “원컨대 일본과의 화평을 잃지 마시옵소서.” 이 말을 들은 성종은 일본에 화친을 위한 사신을 파견했다.

임진왜란 당시의 관료이자 학자인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기록한 책이다. (출처 : 경향DB)


신숙주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1471년, 성종 2년)를 남겼는데, 바다 동쪽 여러 나라(日本國, 琉球國)에 관한 기록이었다. 서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저 이웃 나라와 외교관계를 갖고 풍속이 다른 나라 사람을 잘 접대하는 데는, 반드시 그 실정을 안 연후에야 예를 다할 수 있고, 그 예를 다한 연후에야 그 마음을 다할 수 있다.” 신숙주가 세종 때 일본에 다녀온 까닭이었다.

그는 일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들의 습성은 굳세고 사나우며, 창칼을 쓰는 데 뛰어나고 배를 다루는 데 익숙하다. 우리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도리에 따라 잘 달래면 예로써 통교하고, 그렇지 않으면 문득 함부로 노략질하게 된다.” 일본의 호전성을 경계하면서도, 그 해법은 화친책이었다.

신숙주는 임금에게 말했다. “일찍이 신이 듣건대, 오랑캐를 대하는 방법은 외양(外攘)에 있지 않고 내수(內修)에 있으며, 변방 방어에 있지 않고 조정(朝廷)에 있으며, 병기에 있지 않고 기강(紀綱)에 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는 것이다.

유성룡은 일본의 침략을 겪고 나서 백여년 전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징비록>을 남겼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 세계질서에 안주했던 조선. 변방의 오랑캐라 여겼던 일본에 침략당하고, 청나라에 항복했다. 나중에는 서양 제국의 하위 파트너였던 일본에 의해 왕조가 멸망했다. 새롭게 민국(民國)을 시작했던 삼일절을 보내며 다시 이 시대의 징비를 생각해본다.


김태희 | 다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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