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허자와 실옹의 대화

허자(虛子)는 30년 동안 은둔하여 공부했다. 마침내 통달하여 세상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모두 비웃었다. “작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큰 이야기를 함께할 수 없구나.” 허자는 서쪽 북경으로 들어가 60일을 머물렀다. 끝내 상대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허자가 깊이 탄식했다. “지혜로운 사람이 모두 사라졌는가? 내가 배운 도(道)가 그릇됐는가?”

짐을 꾸려 돌아오는 길에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올랐다. 남으로 넓고 푸른 바다를, 북으로 큰 사막을 바라보니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마침내 세상을 등질 생각을 품었다. 수십 리를 걸어가니 ‘실거지문(實居之門)’이라 쓰인 돌문이 서있었다. “의무려산은 조선과 중국이 만나는 경계에 있고, 동북의 이름난 산이다. 반드시 숨은 선비가 있을 터. 내 반드시 만나볼 것이다.”

돌문으로 들어가니, 다락집 위에 한 거인이 홀로 앉아 있는데, 모양이 기이했다. 나무를 깎아 ‘실옹(實翁)이 사는 곳’이라 쓰여 있었다. 허자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허(虛)라 이름한 것은 장차 천하의 실(實)을 깊이 살피려는 뜻이요, 저 사람이 실이라 이름한 것은 장차 천하의 허를 깨뜨리려는 뜻이리라. 허허실실(虛虛實實)은 오묘한 진리이니, 저 사람의 말을 들어봐야겠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 초상화 (출처 : 경향DB)


담헌 홍대용의 <의산문답>의 시작 부분이다. 허자는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는 담헌을 연상시킨다. 실옹의 말은 담헌의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허자에게 실옹은 일갈했다.

“아아! 슬프다. 도술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구나. 공자가 죽은 후 제자들이 공자의 뜻을 어지럽혔고, 주자 문하의 말기에 유학자들이 학문을 어지럽혔다. 그 업적은 높이면서 그 참은 잊고, 그 말은 익히면서 그 본뜻은 잃어버렸다.” 박제된 학문을 붙들고 권력을 추구할 뿐 그 본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학(正學)을 지킨다는 건 실은 긍심(矜心·자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사설(邪說)을 배척한다는 건 실은 승심(勝心·이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인(仁)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건 실은 권심(權心·권세를 부리려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명철하게 자신을 보전한다는 건 실은 이심(利心·자기만 이로우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네 가지 마음이 서로 뒤엉켜 참뜻은 날로 사라지고, 천하는 휩쓸려 나날이 ‘허(虛)’로 치닫는다.”

올해가 해방 70년. 괄목상대하고 전도양양한 듯하더니,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가 길다. 돌아보니 미진하고, 내다보니 불안하다. 허허실실. 허와 실을 살피고, 어려울수록 기본부터.


김태희 | 실학21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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