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경세가 유형원

허생의 실력에 탄복한 변씨가 말했다. “지금 한창 사대부가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고자 하는데, 이야말로 뜻있는 선비가 팔을 걷어붙이고 지혜를 펼 때요. 당신은 재주를 갖고도 어찌 괴롭게 어둠에 파묻혀서 이 세상을 마치려 하시오.” 허생이 답했다. “예로부터 어둠에 파묻혔던 분이 어디 한둘이었소? 반계거사 유형원은 군량을 조달할 능력이 있었으나 저 먼 바닷가를 거닐기만 했소.”

연암 박지원은 허생 이야기에서 세상을 경륜할 실력을 갖추고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일생을 마친 대표적 사람으로 반계 유형원(1622~1673)을 예시했다. 성호 이익은 조선 개국 이래 시무를 알았던 사람으로 율곡 이이와 함께 반계 유형원을 꼽았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 서문에서 재야에서 나라의 방책을 제시한 인물로 그를 거명했다.

유형원이 태어난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나 아버지 유흠이 옥사에 연루돼 죽음을 당했다. 15세 때는 병자호란이 일어나 유형원은 가족을 이끌고 피란을 가야 했다. 삼전도 항복의 굴욕과 중원의 주인이 바뀌는 충격을 겪었다. 32세에 전라도 우반동(전북 부안)으로 내려갔다. 이곳 바닷가에서 저술한 필생의 역작이 바로 <반계수록>이었다.

유형원이 낙향해 '반계수록'을 완성한 전북 부안의 반계 유허지 (출처 : 경향DB)


<반계수록> 26권 가운데 8권에 걸쳐 전제(田制)에 관해 논의했다. 토지문제를 비롯해 교육과 인선, 군제 등 국가경영의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주제를 다뤘다. 시대와 제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소산이었다. <반계수록>은 그가 죽고 난 후 윤증의 제자 양득중이 영조에게 추천하여 왕명으로 간행되었다(1770년). 저서가 세상에 나온 지 이미 100년이 지난 때였다. <반계수록>은 바로 정책으로 채택되지 않았지만, 경세의 뜻을 품은 조선후기의 여러 실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반계수록>에 덧붙인 글인 ‘서수록후(書隨錄後)’에서 말했다. “천지의 이치는 만물에 드러나니 물(物)이 아니고는 이치는 드러날 곳이 없으며, 성인의 도(道)는 만사로 행해지니 사(事)가 아니고는 도가 행해질 바가 없다(天地之理 著於萬物 非物 理無所著, 聖人之道 行於萬事 非事 道無所行).”

<당의통략>을 쓴 이건창이 조선 당쟁의 첫째 원인으로 지나치게 도학(道學)을 높이는 전통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조선에는 정도전을 비롯하여 사공(事功)을 중시하는 경세가의 흐름이 엄연했다. 오늘날 개별 이슈에 관한 전문가는 많은 듯한데, 종합적 통찰력과 구체적 실천성을 겸비한 경세가는 어디에 있는가. 실사(實事)·실공(實功)을 강조하는 경세가의 전통에 주목한다.


김태희 | 실학네트워크21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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