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새재를 넘다

며칠 전 무르익은 가을을 밟으며 문경새재를 넘었다. 문경의 옛길박물관 쪽에서 제1관문(주흘관)·제2관문(조곡관)을 거쳐 제3관문(조령관)을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이 길을 통해 옛 영남의 인재들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갔다. 문경새재는 주변의 죽령이나 추풍령보다 선호되었다. 죽죽 미끄러지거나 추풍낙엽으로 떨어지지 말고, 문경(聞慶), 즉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문경새재는 영남대로의 주요 구간이면서 옛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부산에 이르는 옛길을 이른다. 영남대로 가운데 옛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영남대로의 효용이 여전하여 그 길 따라 철길이 지나고, 고속도로가 달리고 있다. 문경새재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새 길은 터널로 지나고 옛길은 남을 수 있었다.

문경새재 길은 걷기에 알맞게 조성되어 있었다. 길가에 시비(詩碑)들이 눈에 띄었다. 김시습·이이·서거정 등의 시 원문과 한글 번역이 나란히 돌에 새겨져 있다. ‘새재로 가는 길(鳥嶺途中)’이란 제목의 퇴계 이황의 시비도 있었다. “산 꿩은 꾹꾹꾹 시냇물은 졸졸졸/ 봄비 맞으며 필마로 돌아오네./ 낯선 사람 만나서도 반가운 것은/ 그 말씨 정녕코 내 고향 사람일세(雉鳴角角水潺潺 細雨春風匹馬還 路上逢人猶喜色 語音知是自鄕關).”

많은 선비들이 문경새재를 지났고, 그만큼 많은 시를 남겼다. 가령 점필재 김종직은 성종 2년(1471년) 함양에 부임하러 가는 길에 조령을 지나면서 ‘과조령(過鳥嶺)’이란 시를 지었다. 시 가운데는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서 전투를 벌인 점을 아쉬워하는 내용이 적잖다. 문경새재는 왜군이 한양을 공격하러 북상할 때 지나간 길이었다.

경북 문경새재의 가을풍경 (출처 : 경향DB)


문경새재는 또한 일본에 가는 조선통신사가 꼭 지나는 길이었다. 인조 14년(1636년) 부사로 참여한 김세렴의 시 ‘조령(鳥嶺)’이 있다. “중천에 비낀 새재 기나긴 돌 사다리/ 백 번 꺾어 돌고 도니 시름 다시 더하네/ 높은 누에 홀로 서니 여러 봉우리 환히 보이고/ 정상에서 내려보니 온 천지가 가을이구나(鳥嶺橫天石등脩 盤回百折更添愁 高軒獨立千峯曉 絶頂平看萬里秋; 한태문의 <조선통신사의 길에서 오늘을 묻다>에서 인용).”

길은 쓰는 사람에 따라 평화의 길이 되는가 하면, 염탐과 침략의 길이 되기도 한다. 옛길의 가을 정취를 즐기면서도 지난 역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가볍지 않다. 아무튼 도중에 돌아오지 않고 고개를 완전히 넘어서 기뻤다. 고갯길은 뭔가가 있다.


김태희 | 실학네트워크21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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