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한국도서관협회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옛길을 걸었다. 걷는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였다. 공주 공산성 앞, 금구향교, 태인 피향정(披香亭) 등지에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심지어 장성 갈재를 넘어가는 길가 바위에도 ‘영세불망비’가 새겨져 있었다.

옛날에 지방 수령이 좋은 정치를 베풀면 선정비(善政碑)를 세워서 기렸다. 공덕을 칭송한다는 의미로 송덕비(頌德碑)라 하기도 하고, 수령의 공적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영세불망비라 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마지막 ‘해관(解官)’편에 ‘유애(遺愛)’ 항목을 두었다. 유애란 훌륭한 수령이 떠난 후에 사랑을 남긴다는 뜻이다. 수령이 정사를 잘 펼쳐 선정비를 세우거나 죽은 뒤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 모범사례이다. 그렇다면 선정비는 치세(治世)의 상징일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영세불망비


<인조실록> 9년(1631) 12월12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계(啓)가 등장한다. “수령이 유애로써 비석을 세우는 일이 예전엔 아주 드문 일이었는데, 근일 목민관이 된 자가 오로지 명예를 구하는 것을 일삼아 먼저 목비(木碑)를 세우고 또 석각(石刻)을 세웁니다. 그러나 그 공적을 공평하게 살펴보면 공효가 조금도 없습니다. 인심이 날로 낮아져 아첨이 풍속을 이루니 오늘날 제거하기 힘든 폐단이 되었습니다.”

인조대에 비석 수가 급증했던 것이다. 이후 비석 금지령(禁止令)에 의해 억제되거나 철거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영조실록> 1년(1725) 1월23일의 기사다. “수령이 비를 세우고 살아있는 사람의 사당을 세웁니다. 숙종 때 조정의 금지령이 지극히 엄했는데도 명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유애’를 강조했던 다산도 <목민심서>에서 관가의 길옆에 선 덕정비(德政碑)가 실제의 덕이 아니라 거짓말만 새겨 비를 믿기 어렵게 되었다는 백거이의 말을 소개했다. 다산은 칭송도 있고 아첨도 있는 선정비를 철거하고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선정비 수효는 헌종·철종대에 증가세로 바뀌어 고종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일부 지역의 연구인 데다 모든 선정비를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시사하는 바 의미심장하다. 선정비가 많았던 때 오히려 정치가 어지러웠고, 칭송이 높을 때 오히려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 역사를 돌아보니 선정비가 늘어난 것은 나라가 망할 징조였다. 거짓과 아첨이 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알겠다.


김태희 | 실학네트워크21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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