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단군과 기자

단군 이야기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데, 단군에 이어 기자를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주나라 무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도 마찬가지다. “요동에 또 다른 세상이 있어, 우뚝한 게 중원의 왕조와 구분되네. 큰 파도 넘실넘실 3면을 둘러싸고 북으로 육지가 이어진 가느다란 땅, 가운데 사방 천리가 바로 조선이라.” 이렇게 하나의 지역 공동체를 설정한 후, 조선의 시조로 단군을 들고, 이어서 후조선의 시조로 기자를 들고 있다.

도대체 기자가 누구인가? 기자는 중국 은나라 주왕의 숙부이다. 주왕의 폭정에 간언하다 유폐되었는데, 주나라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고 갇혀 있던 기자를 풀어주었다. 기자는 무왕에게 정치의 방책을 가르쳐주기도 했지만, 그의 신하 되기를 꺼려 은의 유민을 이끌고 이주했다. 이때 무왕이 그를 조선에 봉해주고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 문헌에 나온 이 이야기는 조선의 유교 식자층에 의해 수용되었다.

기자를 중화주의로만 볼 것인가? 고려 말 목은 이색(1328~1396)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선씨(단군)가 나라를 세운 것은 당요 무진년이다. 비록 대대로 중국과 통하였으나 일찍이 군신의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무왕이 은 태사(기자)를 봉하면서 신하로 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요 무진년은 시기적으로 중국의 역사와 나란히 한다는 인식이요, 군신관계 부정은 정치적 독립성을 의미한다. 또한 단군은 시원성과 고유성을, 기자는 문명성과 세계성을 상징하며 절묘하게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이 하늘로 돌아갔다고 전해지는 음력 3월 15일을 맞은 14일 남산제례문화원이 주최하고 남산전통제례 봉행위원회가 주관하는 '어천절 대천제'가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중구청의 후원으로 봉행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이색은 몽골 세계제국에 의해 사해가 하나가 되니, 중화와 변방의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그의 인식은 정도전 등의 신진사대부에게 전해지고, 조선이란 나라를 건국하는 바탕이 되었다.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무너지자 거꾸로 기자는 폐기되었으며, 독립을 위해 단군신화는 강조되었다.

고려 무신집권기까지도 남아 있던 삼국분립의식이 사라지고 삼한일통의식이 나타난 것은 몽골 제국과의 항쟁을 겪으면서였다. 바로 단군과 기자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였다. 사상은 시대적 과제를 풀기 위한 모티브를 제공한다. 이제는 남과 북을 아우른 우리 공동체를 보존하면서도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고, 두 강대국이 경쟁하는 세계질서에 적극 대응해야 할 때인데….


김태희 | 실학21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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