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연암이 당한 비방

북벌론이 등등하던 때다. 조경암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옛것을 좋아하여 검은 비단 모자와 예사롭지 않은 옷을 입고 다녔다. 하루는 두 학동을 데리고 구월산에 가는데, 차림새를 이상하게 여긴 산성(山城)의 별장(別將)이 졸개 두어 명을 거느리고 뒤를 밟았다.

구월산에 올라 조경암이 학동에게 “이 산의 본래 이름이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말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별장이 “네가 오랑캐 옷을 입고 오랑캐 말을 하니 오랑캐가 아니고 무엇이냐?”며 포박하려 대들었다. 궁색해진 조는 머리를 드러내 상투를 보이며 말했다. “너는 상투 있는 오랑캐를 본 적이 있느냐?” 가까스로 봉변을 면한 조가 훗날 그 일을 회고하면서 덧붙였다. “그땐 머리털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지금처럼 나이 먹어 대머리였다면 어찌 됐겠소?”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부임했다. 중국견문기인 <열하일기>로 이미 명성을 높인 그였다. 그는 평상복으로 옛날 옷을 만들어 입는가 하면, 중국에서 본 벽돌로 집을 짓기도 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것이라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이게 다 오랑캐 제도인가요?” 연암은 그저 웃어 넘길 수밖에. 그러나 연암을 음해하려는 자들이 비방을 만들어냈다. 그가 ‘오랑캐 옷을 입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여기에 <열하일기>가 ‘노호지고(虜號之藁)’, 즉 청나라 오랑캐의 연호를 쓴 원고라는 비방도 더해졌다.

당시 조선은 청에 복종하여 부득이 그들의 연호를 쓰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오랑캐라 배척하고 이미 멸망한 명을 받들었다. 실정이 이런지라 연암은 <열하일기> 첫 기록에서 ‘후삼경자(後三庚子)’란 표현을 썼다. “왜 ‘후(後)’라 칭했는가?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즉 숭정(崇禎)이라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가 시작된 후라는 뜻이다. 왜 ‘삼(三)’이라 했는가? 연호로 삼은 후 세 번째 돌아온 경자년(庚子年·1780년)이라는 뜻이다. 숭정이란 연호는 왜 숨겼는가? 장차 압록강을 건너게 된 때문이다.”

청이 지배하는 중국에서 명의 연호를 쓸 수 없다는 것인데, 왜 굳이 이런 해명을 했을까? 존명배청(尊明排淸)의 당시 분위기에 겉으로는 따르면서도 기실은 궁색한 현실을 비꼰 셈이다. 연암은 항변했다. “반드시 ‘오랑캐 황제’라 배척해야만 비로소 춘추 의리를 엄수하는 것이 된단 말인가?”

새로 발견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ㆍ1737∼1805)『열하일기(熱河日記)』의 우리말로 번역한 필사본. (출처 : 경향DB)


북벌론은 ‘내부 통제용’으로 전락했다. 연암의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북벌론에 편승해 비방에 가담했다. 당초 비방이 목적인 사람이나 이에 영합하려는 사람이 뭘 꼼꼼하게 살피겠는가.


김태희 | 실학21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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