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시중의 정치

영조와 정조는 조선 후기사회에 이채를 더했다. 그들은 스스로 ‘군사(君師)’ 곧 철인 왕을 자임하였다. 알다시피 조선왕조는 건국 이래 오랜 세월 성리학을 국시로 여겨 온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영조와 정조 같은 석학이 나온 것이었다.


조선 전기만 해도 사정이 달랐다. 개혁정치가 조광조는 중종을 철인 왕으로 만들고자 정성을 쏟았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선조 때에는 시골로 물러났던 선비들이 조정에 복귀해, 선조를 철인 왕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 역시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철인 왕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영조와 정조는 역사적 기대에 부응하였다고나 할까. 그들은 한 나라의 왕이자 최고의 성리학자였다. 그들은 유교 경전인 <중용>에 명시된 ‘시중(時中)’의 가치를 바탕으로 이상 국가를 이루고자 했다. “군자의 중용이라야 한다. 군자가 되어서 때(時)에 맞게(中) 하는 것이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중용> 제2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상황이 아무리 불리해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그 목표였다.


영조와 정조에게 ‘시중’은 필수과제였다. 그들의 조정은 당쟁으로 혼란했다. 왕은 국정 주도권을 확고하게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당파를 초월한 임금(君)이자 스승(師)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국정의 중심에서 해묵은 적폐를 청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것은 수월한 과제가 아니었다.


영조는 아버지 숙종의 정치적 실패를 교훈으로 삼았다. 숙종은 당파싸움을 부채질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당쟁의 최종 심판관으로서 숙종은 힘을 과시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당쟁도 더욱 고질화되었고 궁중도 분열되었다. 영조는 부왕의 실패를 거울삼아 전략을 바꾸었다. 그는 여러 당파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기를 꿈꾸며, 탁월한 성리학자로서 신하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을 연출했다. 우뚝한 ‘군사’로서 당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영조 때는 대체로 조정이 안정되었고 민생도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아들 사도세자와의 관계가 파탄으로 흘렀다. 마침내 임오화변(1762, 영조 38)이 일어나, 왕이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다. 허다한 변명과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영조의 도덕성은 훼손되었다.


겉으로는 왕이 여러 당파를 두루 포용하려는 듯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불편한 관계였던 남인과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사도세자를 비호하는 경향을 보인 소론과도 관계가 악화되었다. 조정의 주요 관직은 노론이 독식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탕평책이라는 말이 빛을 잃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정치적 유산을 놓고 고심하였다. 그 역시 초당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철인 왕 ‘군사’의 길을 가기로 했다. ‘시중’의 왕이고자 했던 것이다. 정조가 특히 그 점을 강조한 것은 1790년대였다. 왕은 신하들에게 시중에 관해 가르치기도 했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일곱 가지 감정은 마음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 가운데 어느 하나가 격분하면 나머지도 움직여서 절도를 잃는다. 그러므로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고 지나침도 없고 어긋남도 없는 시중이 얼마나 중요한가.”(조선왕조실록, 정조 17년 5월25일)


고대 중국의 고전에 등장하는 어진 왕처럼 정조는 신하들에게 철학과 윤리를 가르쳤다. 그는 신하들에게 묻고 배우기에 힘쓰는 평범한 왕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조광조는 중종에게서 철인 왕을 기대했다가 쫓겨나 목숨마저 잃었다. 그런데 정조에게는 조광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이 역력했다. 만약에 조광조가 정조의 조정에 설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조선은 성리학적 이상국가로 변할 수 있었을까.


정조 때 조정에는 훌륭한 선비들이 많았다.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김종수, 심환지, 박지원, 이덕무, 홍대용, 김조순 등의 이름을, 우리는 줄줄이 읊을 수 있다. 그래도 세상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소강상태가 유지될 뿐이었다. 


“어찌하여 인심은 나날이 갈라지며 현안에 대한 주장은 더욱더 갈라지는지 모르겠다. 신하들이 동서남북으로 제각기 당파를 만들어 이편과 저편으로 나뉘어 자기 당의 이익만 추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식이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고 사람도 사람답지 못할 것이다.”(홍재전서, 제48권)


조선시대엔 27명의 국왕이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정조처럼 학식이 뛰어나지 못했다. 왕은 무려 187권(100책)이나 되는 저술을 남겼다. 초야에 묻혀 평생 학문에 정진한 선비라도 이처럼 많은 저술을 남긴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그런 정조도 ‘당쟁’이란 두 글자 앞에서는 무력했다. 왕은 ‘시중’의 뜻을 헤아리며 탕평책에 힘썼으나, 당파적 이익에 매달리는 조정대신들에게서 뾰족한 대책이 나올 수는 없었다.


시민들에게 물어야 한다. 기득권을 대표하는 학자와 정치가들에게는 새 시대를 열 힘이 없다. 의회정치가 공전할 때면 광장의 시민들에게서 답이 나온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