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일본 장관의 경천사 탑 약탈

1907년 2월 개성 인근의 경천사터에서 천인공노할 사건이 터졌다.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궁내부 대신(장관)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가 경천사 10층 석탑(사진)을 무단으로 해체해서 반출해 간 것이다. 일본 정부가 파견한 외교사절이 저지른 만행에 국내외 여론이 아연실색했다. 다나카는 “고종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일본의 이륙신문마저 다나카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 황제가 기증했다면 제대로 격식을 갖춰 인수인계해야 했다. 그러나 기증문서도, 공식행사도 없었다. 고종이 진짜 일본에 기증했는지 의심스럽다.”

 

약탈의 전모를 알게 되면 기가 막힌다. 주민들의 만류를 총칼로 위협한 일본인들은 높이 13m에 달하는 대리석탑을 140여 점으로 잘라 달구지로 실어날랐다. 대한매일신보는 “다나카는 우리 국민을 만만히 봤다. 한국 인민은 결단코 그 만행과 모욕에 항거할 것”(3월7일)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믿거나 말거나식의 해외토픽처럼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영국인 어네스트 베셀과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현장 취재한 결과를 만천하에 알렸다. 베셀은 자신이 운영한 대한매일신보와 영자지 코리아데일리뉴스에, 헐버트는 일본의 저팬 메일과 미국의 뉴욕포스트에 폭로기사를 썼거나 기고했다.

 

특히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황제밀사로 파견된 헐버트는 현지신문 쿠리에 라 드 콩페랑스에 “경천사 10층석탑 사건은 일본이 조선의 문화를 파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까지 한몫 거들었다. 데라우치는 “석탑을 제자리로 돌려놓아라”고 다나카를 압박했다. 데라우치는 조선이 영영 일본의 식민지로 남을 거라 굳게 믿었을 것이다. 조선총독의 입장에서 보면 경천사탑은 엄연히 ‘조선총독부의 소유’였다. 다나카는 국내외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끝내 피하지 못했다. 결국 1918년 11월 경천사탑을 반환했다. 11년 전 약탈한 그대로, 즉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돌아왔다. 당대의 기술로는 복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상태였다.

 

경천사탑은 원나라 간섭기인 1348년 원나라 황제와 황후, 황태자를 위해 세워진 탑이다. 고려왕실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황후는 바로 14세의 나이로 공녀로 끌려갔다가 원 황제의 부인이 된 기황후다. 지금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전시된 경천사 10층 석탑에는 이렇게 기구한 사연이 남겨 있다.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