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정조 탕평의 종말

정조가 죽자 탕평은 끝났다. 정조의 탕평정치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한 것이다. 영조는 왜 탕평책을 폈는가? 붕당 투쟁이 극심한 폐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숙종 때 ‘일진일퇴(一進一退)’ 속에 한 붕당이 집권하면 반대 붕당은 살육을 당했다. 숙종은 조정을 물갈이하듯 판을 바꿨다. 그래서 ‘환국(換局)정치’라 불렀다.

서인이 승리하고, 남인은 몰락했다. 주류가 된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소론은 경종의 왕위 계승을 지켰고, 노론은 그것을 뒤집으려 했다. 노론은 경종의 동생 연잉군을 새 왕위 계승자로 밀면서 네 대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 왕위 계승에 성공했다. 그 왕이 바로 영조였다. 붕당의 대립이 이제 국왕을 선택하기에 이른 것이다.

노론의 힘을 업고 즉위한 영조였지만 국왕의 운명이 붕당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노론 편만 들어서는 국왕의 권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영조의 탕평책이 등장한 배경이었다. 탕평을 향한 영조의 노력은 가상했지만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인원수를 안배하는 데 급급하고 일부 중도적 인사에 의해서만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붕당을 없애자는데 이른바 ‘탕평당’이 생겨났다는 지적도 있었다.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캠퍼스 안에 있는 탕평비. 군자와 소인의 처세를 구분한 '예기'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출처 : 경향DB)


정조는 ‘의리탕평’을 선언했다. 영조의 탕평을 계승하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원칙 있는 탕평을 하겠다는 것이다. 탕평윤음을 발표하여 당색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할 것이니, 신료들도 당색을 따지지 말라고 당부했다. 버림받은 남인의 인재들을 기용하고, 서북과 영남 등 소외된 지역의 인재를 배려했다. 왜 정조가 죽자마자 탕평정치는 끝나고 말았는가? 규범과 제도로 정착되지 않고 오로지 영명한 탕평군주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죽자 노론 벽파는 신유옥사를 일으켰다. 정조 탕평정치의 일각을 이루던 정치세력을 천주교도라고 덧씌워 몰아내고 죽였다. 정조의 탕평이 폭력 상태를 배제하고 인재를 고루 참여시키는 성과를 올렸지만, 정조가 없는 상태에서 탕평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근대 정당이 처음 출현했을 때 통합을 해치는 사사로운 이익집단으로 비난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과 이해관계가 다르기 마련인데, 통합이란 명분 아래 모든 사람의 일치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가짜 통합이다.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조직하는 정치활동과 함께 정당 내에서의 참여와 경쟁이 촉진되는 체제가 필요하다. 경쟁 자체를 분열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문제는 경쟁 자체가 아니라 경쟁 규칙의 공정성과 경쟁 내용의 생산성이다.


김태희 | 다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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