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코끼리 이야기

조선 태종 11년, 일본국왕 원의지(源義持)가 사신을 보내 코끼리를 바쳤다.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없었던 것이라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공조전서를 지낸 이우(李瑀)가 구경 가서 보고는 모양이 추하다며 침을 뱉었다. 코끼리가 화가 나서 그를 밟아 죽였다. 코끼리를 전라도 섬으로 보냈다.

“순천부 노루섬에 풀어 놓았는데, 수초(水草)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전라도 관찰사의 보고에 임금이 불쌍히 여겨 육지에서 예전처럼 기르도록 명했다. 육지로 나온 코끼리에 또 사람이 차여 죽고, 코끼리의 식사량이 너무 많았다. 또다시 섬으로 보내졌다. <실록>에 나온 이야기다.

연암 박지원은 중국여행에서 코끼리를 보았다. 기괴하고 거창한 구경거리인지라 <열하일기> ‘상기(象記)’라는 글로 남겼다. 사람들은 길고 자유자재인 그것이 미처 코라고 상상할 수 없어 또 코를 찾는다. 크고 긴 두 어금니도 특이했다. 세상 사람들은 사물의 생김새를 ‘이치(理)’라 하여 설명하곤 하는데, 코끼리의 생김새를 설명하다보면 궁색해진다. 이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강희제 때, 사나운 범 두 마리가 있었는데 길들일 수 없었다. 황제가 노하여 코끼리 우리에 집어넣게 했다. 범을 본 코끼리는 크게 두려워 코를 한번 휘둘렀다. 범 두 마리가 그 자리에서 넘어져 죽었다. 코끼리가 범을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연암은 말했다. “코끼리가 코로 범을 때려눕혀 죽이니 그 코는 천하무적이다. 그런데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로 쳐들고 서있다.”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할 수는 없다. 무릇 관계란 상대적인 것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이름의 책이 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오히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떤 프레임을 부정하는데, 오히려 그 프레임이 활성화되는 역설적 상황이다. 저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다른 글에서 유권자들이 가치·유대·신뢰·정체성에 입각해 투표한다고 파악했다. 조언하기를, 이슈·여론조사·정책목록·논리·중도·우월감·전문용어·책임전가 등의 함정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유권자들의 표심을 알기란 쉽지 않다.

연암은 말했다. “코끼리는 눈으로 보고도 그 이치를 잘 모르거늘, 하물며 천하 사물은 코끼리보다 만 배나 복잡함에랴. 성인이 <주역>을 지을 때 상(象)이란 글자를 쓴 것은 만물의 변화를 다하려는 까닭이었던가?” 코끼리를 떠올리니, 크고 착한 모습이 익숙하다. 다시 8가지, 64가지로 천변만화하더라도 놀라지 말 것이다.


김태희 | 다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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