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조운찬 칼럼]애이불상<哀而不傷>의 오월

정도상의 신작 장편 <꽃잎처럼>은 5·18민주화운동 시민군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간적 배경은 1980년 5월26일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15분까지 10시간 남짓이다. 최초의 5·18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물론이거니와 <봄날>(임철우), <소년이 온다>(한강), <광주 아리랑>(정찬주) 등 많은 ‘오월 소설’이 열흘간의 항쟁 전 시간을 포괄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 작가 정도상이 항쟁의 일부만 다룬 것은 오월항쟁의 진행과정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겠다는 뜻일 수 있다. 형식의 차별성이다. 


그런데 작품을 읽다보면 <꽃잎처럼>의 특징은 형식보다는 주제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항쟁의 최후는 시민군의 쓰라린 패배다.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의 일부는 계엄군 진압을 앞두고 귀가한다. 남아있는 자는 총에 맞고, 군홧발에 차이고, 대검에 찔려 최후를 맞는다. 살아남는 자는 굴비 엮이듯 끌려간다. 명백한 패배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선 시민군은 결코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다. 자발적 선택으로 당당히 최후를 맞는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우(윤상원의 작중인물)는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지면서도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힘은 사랑이다. 주인공 명수는 말한다. “내가 지금 도청에 있는 이유는 한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정도상은 ‘오월의 작가’다. 1987년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단편 ‘십오방 이야기’로 등단했다. 교도소 미결사(舍) 15번 방에서 우연히 만난 계엄군 공수부대원과 운동권 대학생 사이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은 대학생의 오월광주에 대한 부채감과 무력감, 공수부대원의 살인 죄의식이 어우러지며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80년대 광주 참상을 고발하며 비탄과 분노, 절망을 토해냈던 작가는 30여년 뒤에는 더 이상 좌절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과 희망, 평등을 얘기한다. <꽃잎처럼>의 마지막 문장은 전남도청 학살 현장에서 생포돼 끌려가는 주인공의 독백이다. “어제와 다른 새로운 생이 시작되었다.” 


오월문학은 시에서 싹이 텄다. 출발은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였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 /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전남매일신문 1980년 6월2일자에 게재된 이 작품은 시라기보다는, 광주 참상을 알린 고발장이었다. 김준태뿐 아니었다. 광주를 노래한 조태일, 김남주, 고정희가 그랬다. 학살의 시대에 ‘시인은 전사’였다. 


40년이 흐르면서 시도 변하고 있다. ‘오월시’ 동인은 1981년 시집 <이 땅에 태어나서>를 낸 이후 꾸준히 오월정신을 형상화한 대표적 동인그룹이다. 이들이 최근 펴낸 시집 <깨끗한 새벽> 속의 작품들은 1980년대 시들과는 사뭇 다르다. 광주항쟁에서 부상을 입은 ‘오월시’ 동인 박몽구가 당시 발표한 시에는 참상 고발, 군부 비판, 자기 참회가 섞여 있다. “… 꿈속의 맨발로 광주에 간다/ 캄캄한 밤에는 하나의 별/ 가시밭길 속에서는 저 하나/ 기꺼이 상처 안고 누워서 돌파구가 되는/ 무등의 형제들을 생각한다/ ….”(시 ‘무등 혹은 우리들 마음의 기둥’) 그러나 40주년에 되돌아본 오월광주는 ‘깨끗한 새벽’이다. 박몽구는 시민군과 함께 끝까지 싸운 광주여성사회단체 송백회에 대해 “삼천리에 깨끗한 새벽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5·18 기념특별전에는 학생·주부·회사원 등 10여명이 쓴 ‘오월의 일기’가 출품됐다. 40년 동안 숨죽여 간직했던 비밀일기를 공개한 것이다. 당시 광주여고 3학년이던 주소연은 폭도로 몰린 게 억울하고 두려워 일기를 작성했다고 말한다. 지난 27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는 계엄군 진압작전 때 희생당한 시민군 23명의 넋을 위로하는 노제가 열렸다. 광주는 더 이상 비탄과 분노에 빠져 있지 않다. 용기를 내어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슬픔을 넘어 희망을 찾아가고 있다. 공자는 <시경> ‘관저’편을 읽고 시의 정신을 ‘애이불상(哀而不傷)’으로 요약했다. 시들이 슬프긴 하지만 절제가 있어 마음의 조화를 해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시경>이 3000년 넘게 읽히는 것은 ‘애이불상’의 힘이다. 40년 전 윤상원의 총에 장전된 채 격발되지 않은 ‘조용한 탄환’, 광주 시민들이 시민군에게 건넨 주먹밥에 사랑과 평화, 연대가 있다. 유네스코는 광주항쟁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면서 5·18을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이라고 밝혔다. 이제는 절제된 슬픔으로 그 역사를 써내려가야 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sidol@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