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즐거운 사라’, 즐겁지 못한 마광수

문학을 법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가. 소설가 염재만의 <반노>는 1969년 외설이라는 딱지를 달고 7년의 세월이 흐른 뒤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염재만은 그의 작품으로 구속되는 날벼락은 맞지 않았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 마광수는 마흔 한 살에 음란물을 쓰고 배포한 혐의로 징역살이를 했고 40대의 10년을 잃었다. 사회는 발전한다고 하지만 예술의 다양성에 대한 관용은 오히려 퇴보했다.

마광수. 그는 1989년 문학사상에 <권태>를 연재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이어 수필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등을 내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마광수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1992년 소설 <즐거운 사라>를 낸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검찰이 음란물이라는 낙인을 찍으면서 명문대 국문학과 교수였던 그는 ‘변태 교수’ ‘음란 작가’로 추락했다.

<즐거운 사라>로 인해 그는 즐겁지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검찰은 소설이 문란한 성관계, 동성연애, 부도덕하고 음란한 성행위 등 외설적인 내용의 범벅이라고 적시했다. 건전한 도덕을 파괴하고 성질서를 무너뜨리며 청소년의 성범죄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구속 수감(경향신문 1992년 10월30일자 23면)했다. 이를 놓고 논란이 거셌다. 일각에서는 쓰레기 같은 것을 써놓고 문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으나 많은 지식인들은 마광수의 편에 섰다. 문학작품에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인간의 본성을 논하고 창의성이 존중받아야 할 문학작품을 질식시키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마광수는 “외설 여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문학작품의 표현을 문제 삼는 것은 문화적 후진국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예술이고 <즐거운 사라>는 외설이라는 위선에 그는 절망했다. 그는 1심 재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대법원까지 결과는 같았다. 1995년 6월 유죄가 확정되면서 그는 연세대 교수직에서 해직됐다. 1998년 사면 복권돼 캠퍼스에 돌아왔다. 그러나 강단의 동료들은 그를 색안경 쓰고 대했고, 그는 ‘왕따 교수’로 겉돌았다. 2000년 6월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그는 이에 극심한 배신감으로 인한 외상성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차츰 안정을 되찾으면서 2004년 강단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문학은 ‘상상력의 모험’이며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이다. 문학은 도덕적 설교가 아니고 당대 가치관에 순응하는 계몽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문학이 상상적 허구의 세계를 통해 그 어느 것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창조적 일탈은 이 사회에서 철퇴를 맞았다.

올해 정년퇴임하는 그가 몇 권의 책을 냈다.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경구를 모은 <섭세론>과 철학에세이 <인간에 대하여>이다. 여전히 그는 성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왜 그렇게 파고드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너무 중요하잖아요”라고.



박종성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