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화투로 흥했다 망한 ‘화가 조영남’

조영남씨(71)는 직업을 ‘화수’라고 말한 적 있다. 화가와 가수의 줄임말이다. 가수와 방송프로그램 진행자로 더 유명하지만, 스스로는 서울대 음대 시절부터 40년 넘게 ‘붓쟁이’로 산 자부심과 그림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미술시장의 화제가 된 것은 “딴따라 미술이면 어때?”라며 고집스럽게 그려온 화투 그림이다. 시인 이상의 초상화에 수백개의 화투짝을 붙여놓고, ‘비와 우산’이라는 그림에서는 화투패 비의 조각들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식이다. 그러나 미술의 새 조류로 매김하고팠던 화투 그림은 이제 법정에 서게 됐다. 무명 화가들에게 10만원씩 줘 붓질하도록 한 그림에 가벼운 덧칠이나 사인만 해 수십만·수백만원을 받고 내다 판 그에게 ‘사기’ 범죄의 굴레가 씌워진 것이다. 박수근·천경자·이우환까지 ‘위작’ 시비로 뒤숭숭한 화랑가에서 조씨는 전대미문의 ‘대작 사건’ 주인공이 됐다.



“화투를 너무 오래 갖고 놀다가 쫄딱 망했다.” 지난달 ‘쎄시봉 콘서트’ 무대에서 농반진반 던진 말에 “독한 수면제로 잠을 청하고 있다”고 한 그의 답에 심적 상처와 회한이 배어 있다.

‘화가 조영남’은 1985년 10월28일 ‘제1회 스타미술전 출품자’로 경향신문 단신 기사에 처음 소개됐다. 여운계·김창완·윤시내·서영춘·김병조·왕영은 등과 함께였다. 조씨가 화투 그림에 몰입한 것도 그즈음이다. 화투 그림은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교포들이 일본을 싫어하면서도 물건너 온 왜색의 화투는 좋아하는 것을 의아해하면서 착안했다고 한다. 조씨는 1995년 5월1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사진)에서 세계 최초로 그림의 오브제로 쓴 화투를 가리켜 “불가지(不可知)한 세상의 패러디”로 정의했다. 그는 “화투는 패를 열어봐야 승부를 알 수 있는 놀이문화 도구”라며 “흑사리 껍데기에서 삼팔광땡까지 등장하는 화투만큼 천차만별의 사람과 세상사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소재는 없다”고 말했다. 정작 칠 줄도 모른다는 화투 그림으로 한 달간 긴 전시회를 여는 ‘화투 철학’을 압축한 말이었다. 그렇게 한·미·일 3국에서 이어온 그림 전시회가 100차례를 넘었다.

“조수였고 관행이었다. 저는 정통 미술을 한 사람도 아닌데….” 고개 숙인 조씨의 항변에 검찰은 선을 긋고 있다. ‘조영남이 그린 작품이 아니었다면 사지 않았을 것’이라는 소비자의 말을 사기죄 징표로 삼고 있다. 섬세한 붓질을 하는 회화 영역에서 창작과 저작권(아이디어)의 경계를 놓고 법정 다툼과 첫 판례가 이어질 판이다.

정작 대작 사건의 불똥은 예술가의 ‘직업 윤리’ 문제로 번지고 있다. 헐값에 부려먹고, ‘유명 연예인의 작품’이라고 숨기며 폭리를 취한 원·하청 구조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갑질’ ‘열정페이’같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는 어두운 단어들이 이 사건에 묻혀 있는 셈이다. 무명 화가들에게 200여차례나 주문했다는 대작은 2011년 이후 주로 이뤄졌다. 대학 시절부터 좋아서 끼고 살았다는 그림이 어느새 대량 생산을 하고, 손이 모자라 빌리는 사업이 된 것이다. 가수, 화가, 배우, MC…. 20권의 책과 입담을 쏟아내며 막힘 없이 71년을 살아온 조씨의 인생 명함 뒤쪽에 ‘사업가’가 새겨졌다.



이기수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