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경복궁 경회루와 구종직 설화

경복궁 경회루에는 구종직에 대한 설화가 전한다. 젊었을 때 교서관의 종9품 하급 관원으로 궁궐에서 숙직했던 구종직은 밤을 틈타 경회루를 몰래 구경하다, 밤마실을 나온 세종과 딱 마주쳤다. 이제 죽었구나 싶었던 찰나, 임금은 그를 용서했다. 거기에 그가 <춘추>(공자가 엮은 것으로 알려진 역사서) 한 권을 막힘없이 술술 외우자, 그 다음날로 종5품의 부교리로 임명하였다. 

파격적인 인사에 신하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벌떼같이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세종은 “그럼, 너희들도 <춘추>를 외워보라”며 관원들과 구종직을 시험했으나, 구종직만이 줄줄이 외워냈다. 세종이 “너희들은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하면서 좋은 관직에 올라 있는데, 구종직이 이 벼슬을 맡지 못할 이유가 어딨느냐?”라며 면박을 주었다. 이 이야기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을 발탁한 세종의 미덕을 칭송하는데, 워낙 유명해서 경회루 관련 일화로 자주 거론될 뿐만 아니라 구종직 인물 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돋아 조금 추적해보니, 역시 설화는 설화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달랐다. 설화도 버전에 따라 세종이라고도 하고 성종이라고도 한 데다, 구종직이 이런 소양이 있을 법하지도 않았다. 그는 경전에 대해 질문하는 성종한테 임금이 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냐고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구종직이 경회루에서 노닐다가 경전 하나 읊고 출세했다는 ‘팩트’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설화의 팩트는 둘째 치고, 이 이야기는 들었던 처음부터 뭔가 뒷맛이 깔끔하지 않았다. 설령 사실이라 한들, 이것이 진정한 미담인가? 임금은 자기 눈에 사람이 들었다고 관료제의 정식 절차를 무시한 인사를 해도 괜찮은 것일까? 당장 저 이야기의 주인공을 연산군으로 바꾸고, 신하의 능력을 경전 외우기가 아니라 음주가무로 바꿔보라. 대번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역사는 정말 탁월한 한 명의 군주가 나오기보다는 연산군이 나오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정치가 고도화될수록 수많은 견제 장치를 마련하고 시스템을 구축한다. 설사 이런 케이스 하나가 성공했다 하더라도 제도화되지 않으면 그저 한때의 특별한 일로 끝나 버릴 뿐이다.

조선 후기에 구종직의 이야기가 활발히 기념된 때가 있었다. 바로 영조와 정조 대였다. 영조는 쇠락한 구종직의 후손을 찾아서 능참봉에 임명하고, 정조는 화성 행행을 하던 길에 근처에 구종직 묘소가 있다며 제사를 내려주었다. 이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였다. 탕평을 강조하던 영조와 정조에게 군주가 중심이 되어 현명한 사람을 등용한다는 이야기가 구미에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정조가 구종직의 무덤에 제사를 내릴 때 “현명한 사람을 임용한 임금의 덕을 아직까지도 칭송하고 있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기념이 갖는 의미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조와 정조 대에는 이런 종류의 얘기가 꽤 유행했던 듯하다. 시를 잘 지어서, 혹은 시조 창을 잘해서 임금 눈에 들어 발탁됐다는 설화로 발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자 실제로 이를 믿고 덤벼드는 인간들이 등장했다. 평안도 출신 김욱은 임금을 만나려고 궁궐 수구문으로 몰래 들어와 숨었다가 금군에게 발각되어 전라도 땅끝으로 유배를 갔다. 이 사례는 정치적 선전이 통속화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꽉 짜인 시스템은 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막기에 이러한 출구가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이를 한 사람의 탁월한 능력에 기대어 성공할 확률은 역사적으로 그렇게 높지 않았다. 영조가 기껏 찾은 구종직의 후손은 능참봉을 하며 능 주변의 소나무를 팔아치우다 파직되었다. 파격의 뒤끝은 씁쓸하기 쉬우니, 권력을 가진 자는 세종이 되겠다는 포부나 자신감보다는 연산군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는 게 낫다.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연재 | 역사와 현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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