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노년에 필요한 10가지

조선 시대 인물로 당시에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지금 유명한 사람도 있고, 그 반대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들도 적지 않다. 그런 인물들 중 하나가 김정국(1485~1541)이다. 사실, 김정국보다 그의 형 김안국(1478~1543)이 더 유명하다. 김안국은 조광조와 짝하여 기억된다. 조광조는 약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기묘사화로 처형된 인물이다. 조광조가 짧은 기간 환하게 타올랐다가 꺼진 불꽃이라면, 김안국은 그 불씨를 살려서 시대를 밝힌 횃불 같았던 사람이다. 김안국이 평생 동안 친구처럼 지냈던 인물이 자신보다 먼저 사망한 동생 김정국이다.

김안국과 김정국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재였다. 불행히도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었다. 김정국이 10세에 모친을, 12세에 부친을 잃었다. 그럼에도 김안국은 24세에 각각 100명의 합격자 중에서 생원 시험을 1등, 진사 시험을 2등으로 한 번에 합격했다. 2년 뒤에는 문과에 급제했다. 김정국도 형에 못지않았다. 23세에 역시 생원과 진사 시험을 모두 합격하고 2년 뒤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들의 관직 생활은 화려했다. 두 사람 모두 문과 합격자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재에게만 허락되었던 사가독서를 했고,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하지만 이들의 관직 생활은 계속되지 못했다. 김정국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기묘사화(1519)가 일어났고, 이 일로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고양 즉, 현재의 경기 일산 지역으로 물러났다. 이곳에서 19년을 살았다. 이 기간을 김정국은 그답게 보냈다. 독서하며 후학을 양성했고, 성리학 이론서와 민간에서 쓸 수 있는 의료책자를 저술했다. 당시에는 민간에서 약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 이론서와 의학서적을 함께 펴냈던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김정국은 1538년에 관직이 회복되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조정에서도 고위직을 지냈다. 하지만 2년 뒤 병으로 사직했고, 결국 다음해에 병으로 사망했다. 다음은 그가 1538년과 1540년 사이 서울에 있는 동안 고양에서 친하게 지냈던 황씨 성을 가진 인물에게 쓴 편지이다.

“그대가 살림 모으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을 내가 서울에서 들었소.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그만 정지하고 고요하게 살면서 천명(天命)에 순응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70살이면 아주 오래 사는 것이니, 가령 나와 그대가 그때까지 산다고 해도 남은 것은 불과 10년이오. 무엇 때문에 마음을 수고스럽게 해가며 말 많은 자들의 욕을 먹는 것이오? 내가 20년을 빈곤하게 사는 동안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땅을 갈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이 각각 두어 벌 있었으나, 눕고서도 남은 땅이 있었고 옷을 입고서도 여벌 옷이 있었고 주발 밑바닥에는 남은 밥이 있었소.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세상을 편하게 지냈소. 비록 넓은 집 천 칸과, 옥 같은 곡식 만 섬과 비단옷 백 벌을 보아도 썩은 쥐같이 여겼고 이 한 몸 살아가는 데에 여유가 있었소.

듣건대, 그대가 입고 먹고 잠자는 것이 나보다는 더 좋다 하는데, 어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으는 것이오?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서적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바람 통할 창 하나, 햇볕 쪼일 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하나, 늙은 몸을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를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이오. 이 10가지는 번거롭기는 하지만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오. 늘그막을 보내는 데에 이 외에 더 무엇을 구하겠소? 분주하고 고단한 중에도 매양 자연과 벗하는 열 가지 재미가 생각나면, 나도 모르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지만, 몸을 빼낼 방법이 없으니, 어찌하겠오. 오직 나의 친구만은 알아주기 바라오.” 이렇게만 살면 노년의 실수를 덜 수 있을 듯도 하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연재 | 역사와 현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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