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관상은 과학인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관상가로 유명한 승려 혜징이 말했다. “내가 관상을 많이 보았지만 이성계 같은 사람은 없었다.” 태종 이방원의 관상도 독특했던 모양이다. 하륜이 이방원의 장인 민제에게 말했다. “내가 관상을 많이 보았지만 당신 사위만 한 사람은 없었다.” 효종은 왕자 시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그를 지켜본 중국 관상쟁이가 말했다. “참으로 왕이 될 사람이다.” 고종의 관상도 범상치 않았나보다. 관상쟁이가 어린 고종의 관상을 보더니 마당으로 내려가 엎드려 말했다. “훗날 나라의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이상은 모두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왕실이 관상을 신봉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길흉을 점치는 온갖 술수를 ‘명과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에 포함시켰지만 관상은 예외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명과학 교재에 관상 관련 서적은 보이지 않는다. 관상은 ‘외도’로 간주하여 배격한다는 것이 국가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숙종조 과거 시험문제에서 관상을 언급했다가 논란이 된 적도 있다. 그런데도 후세에 길이 전할 실록에 허무맹랑한 관상 이야기를 버젓이 실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태조와 태종, 효종과 고종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원래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었다. 태조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고, 다섯째 왕자였던 태종은 형제들을 제거하고 왕좌를 차지했다. 효종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형 소현세자 대신 왕위에 올랐다. 고종의 즉위도 예상 밖이었다.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은밀한 합의가 아니었다면 왕노릇은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통치자의 정통성이 취약하면 신기한 이야기를 지어내서라도 통치자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점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실록의 관상 이야기에는 그런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비범한 인물은 비범한 운명을 타고난다는 믿음을 이용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명인사의 일화에 관상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관상가의 예언이 맞았다는 이야기만큼 흔한 것이 빗나갔다는 이야기다. 정승 유척기는 서명현의 관상을 보고 크게 될 그릇이라 여겨 사위로 삼았다. 기대와 달리 서명현은 20세로 요절했다. 유척기는 통곡했다. “다시는 관상을 보지 않겠다.” 이천보는 젊어서부터 글솜씨가 뛰어났다. 관상쟁이가 말했다. “글솜씨 때문에 가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웬걸, 이천보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관상은 서사의 극적 효과를 위한 반전의 장치이기도 하다.

믿거나 말거나 그만이라지만 관상을 믿었다가 패가망신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조선후기 굵직한 역모 사건에는 으레 관상쟁이가 개입했다. 1680년 경신옥사, 1721년 신임옥사, 1728년 이인좌의 난, 1755년 나주괘서사건, 1786년 구선복 역모 사건, 모두 관상을 운운하며 역모를 부추긴 자들이 존재했다. 왕이 되고 정승이 될 상이라는 말을 믿고 역모를 꾸몄는데, 그 말은 어째서 맞지 않았던 걸까.

사람은 의미 없는 것은 잊어버리고 의미 있는 것만 기억한다. 무심코 시계를 보았는데 유독 4시44분이 자주 보이는 이유가 이것이다. 시계에 4시44분이 표시될 확률은 다른 시간과 마찬가지로 1440분의 1이다(24시간×60분). 9시27분이나 5시12분처럼 의미 없는 숫자는 아무리 반복되어도 기억하지 못한다. 반면 4시44분은 불길한 숫자라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자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을 ‘선택적 기억’이라고 한다.

인상을 보고 성격을 짐작하면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틀리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우연히 맞으면 기억에 남는다.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 선택적 기억에 기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불과하다. 풍수, 사주, 해몽, 모두 마찬가지다.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혐오도 그렇지 않을까.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연재 | 역사와 현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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