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군주의 일심

조선 시대에는 나라가 어려울 때 임금이 지식인과 관리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구언(求言)’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때 올라온 상소들의 첫 항목은 대개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한 말이다. 그는 천하만사가 임금 마음에서 비롯되니, 임금의 마음이야말로 천하의 근본이라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품위는 있으나 내용은 없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것이 꼭 그렇지는 않았다.

조선의 국가체제를 수립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정도전이다. 그도 ‘군주의 일심’(君主의 一心)을 강조했다. 그는 건국 직후에 조선 최초의 법전인 <조선경국전>을 지어, 조선의 국가체제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재상은 최고의 정책 결정자이자 집행자였다. 국정 운영에서 큰 문제는 임금과 의논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할 권한이 주어졌다.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리들은 재상의 지시를 받았다. 재상은 인사, 군사, 재정, 상벌에 관한 권한을 가졌다. 임금은 두 가지 권한만 가졌다. 하나는 재상을 선택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큰 문제에 관해 재상과 협의하는 권한이었다.

정도전에 대한 많은 연구는 그가 재상 중심의 국가체제를 제시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 관점에 따라 조선의 국가체제를 놓고 신권 중심의 정도전과 왕권 중심의 태종 이방원이 싸웠고, 결국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했다고 이해했다. 이 시각은 조선 역사를 신권과 왕권의 갈등의 역사로 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맥락에서 보면 ‘군주의 일심’이 천하만사의 근본이라는 말은 별 의미 없는 말이다. 고려 시대 연구자 김인호 교수는 조금 다른, 하지만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을 내놓는다. 정도전이 제시한 국가체제는 그가 살았던 고려 말 상황이 안고 있던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결과물이었다는 주장이다. 정도전은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시기를 살았다. 사실은 이들 이전부터 고려는 총체적 혼돈 상태였다. 국왕들은 측근에 의존해 자의적 통치를 이어갔다. 그들 자신이 윤리적 방종을 그치지 않았다. 국왕들이 그런 형편이니 측근이 반듯할 리 없었다. 정도전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국가 운영체계를 짜야 했다.

정도전은 바른 정치를 하려면 먼저 국왕 자신이 도덕적으로 성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많은 측근 재상들을 정리해야 했다. 그들은 수많은 모순된 행정 명령과 이권 개입의 원흉이었다. 정도전은 국가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하고 재상 한 명이 이를 전체적으로 관할하도록 구상했다. 재상의 강력한 권한은 임금과 경쟁하기 위한 것이 아닌, 국정 시스템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강력한 재상은 국왕과 어떤 관계를 맺었던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재상이 모든 실무를 처리하면 그가 모든 정치권력을 갖는 것일까? 우리는 그리 생각하기 쉽지만, 정도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에는 행정의 측면과 가치 혹은 윤리의 측면이 있다. 행정이 지킬 것이 법이고 추구해야 할 것이 효율성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로 수렴되어야 한다. 국왕은 재상의 위에서 그것을 살피는 존재였다. 정도전은 그것을 정치라 생각했다.

가치나 윤리의 바탕은 반듯하고 성실한 마음이다. 조선의 정궁(正宮) 경복궁에서 대표적인 임금의 공간이 근정전(勤政殿)과 그 뒷건물 사정전(思政殿)이다. 근정전에서 국가 공식 행사가 열리고, 사정전에 임금이 거처하며 일상적으로 정치가 이루어졌다. 두 건물의 이름을 지은 정도전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정치를 함에 부지런히 힘쓰고 끊임없이 생각하라는 말이다. 효율성은 신뢰 위에서만 존속한다. 신뢰할 수 없는 효율성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길게 보면 조선은 정도전이 제시한 길을 걸었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연재 | 역사와 현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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