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답사가 키워내는 인간형

매해 3월 말, 9월 말이면 전국의 사학과가 전국을 떠돈다. 정기답사 시즌이기 때문이다. 같은 때 돌아다니다 보니 유적지에서 서로 만나는 일도 흔하다. 안면 있는 교수들은 반가움을 나누고, 학생들은 자료집을 서로 교환하기도 한다. 이 시즌에 다 같이 움직이는 건 별 이유가 없다. 그저 개강 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고, 본격적인 꽃놀이, 단풍놀이 전에 가야 전세버스와 숙소 가격이 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들이 놀러 다니지 않는 시즌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춘계 답사 때는 꽃샘추위로 추위에 떨기 일쑤고, 추계 답사 때는 늦더위에 시달리거나 태풍을 만나기 일쑤다. 

날씨도 안 좋고 학점을 따로 부여하는 강좌도 아니며, 교수가 준비하지도 않는다. 교수는 조언만 할 뿐, 답사지 선정, 숙소 및 식사 장소 예약, 자료집 제작 등 모든 과정은 학생이 주도해서 준비한다. 개강 직후 답사를 못하는 건 이만큼 학생들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서이기도 하다. 

100명 가까운 학생들이 움직이는 여행이기에 크고 작은 탈이 난다. 이런 단체여행 대부분이 그렇듯 숙소는 좋지 않다. 한정된 욕실을 놓고 신경전이 오가기도 하고, 부족한 콘센트에 휴대전화 충전법을 고심하기도 한다. 누군가 발을 접질리기도 하고, 변덕스러운 날씨에 감기에 걸리기도 한다. 자기들끼리 싸움이 나서 고성이 오갈 때도 있다. 솔직히 교수들도 이런 대규모 답사 인솔이 달갑진 않다. 비루해진 늙은 몸뚱이는 이런 단체여행이 힘들다는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학과는 해마다 답사를 떠난다. 졸업 요건에 답사 참여 횟수를 넣는다든지 장학금 수여의 순위 등을 부여하며 답사를 독려하고 정규 커리큘럼에 준하게 취급하기까지 한다. 체력 걱정을 할지언정 교수들도 답사를 장려한다. 교수가 다 해버리는 게 속 편하다 싶을 때도 학생들이 하도록 놔둔다. 왜냐하면 바로 이 방식의 이 답사가 학생들을 성장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답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배운다. 답사지를 선정하고 자료집을 만들기 위해 유물과 유적에 대해 공부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지나고 보면 그 어떤 국보나 보물보다도 자기가 조사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같이 준비하는 사람들과 협업하는 법, 100명의 조직을 움직이는 체계를 고민하고, 공적 목적을 위해 사욕을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일정 챙기느라 낮엔 식사도 거르고 유적지도 못 보고 밤엔 친구들처럼 술 마시고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맑은 정신으로 하루의 결산을 맞추고선 다음날 일정을 위해 물만 마시고 잠든다.

답사에 단순 참여하는 학생도 배운다. 역사를 향유하는 여행의 형태를 배우며, 단체여행에서 ‘팔로어’가 지켜야 할 규율을 배운다. 우리는 맨날 ‘리더’만 강조하지만, 세상은 리더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좋은 팔로어’가 있는 곳에 ‘좋은 리더’가 있고, ‘좋은 팔로어’가 ‘좋은 리더’로 성장한다. 술게임 하며 질펀히 놀던 신입생은 몇 년 후 신입생의 식사를 챙기는 선배로 성장한다.

지난 9월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전국 사학과 교수들의 답사 인증사진이 줄지어 올라왔다. 어딘지 모르게 다들 좀 들떠 있었다. 코로나19로 2~3년씩 제대로 못한 답사가 드디어 재개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전국 사학과가 유적지를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코딩과 반도체만 중요하다고 하는 세상에서 전국의 사학과는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열심히 코딩한 앱, 반도체가 들어간 기기에서 볼 콘텐츠는 누가 만들까? 그렇게 만든 콘텐츠를 향유할 사람이 없으면 그 코딩과 그 반도체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적 목적을 위해 사욕을 접는 법, 좋은 팔로어가 되는 법을 배운 이 학생들은 이 사회에 필요가 없는가? 화창한 가을 답사, 즐거운 학생들 목소리에 마음 한쪽은 되레 쓸쓸해졌다.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연재 | 역사와 현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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