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김원봉과 노덕술

“내가 왜놈 (앞잡이)의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약산 김원봉 선생(1898~1958)과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의 악연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약산의 직접 증언은 아니라 어디까지가 팩트인지는 모르지만 약산의 동지들이 남긴 회고담 등을 모아보면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이 ‘감히’ 의열단장이자 조선의용대장이며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을 모욕한 것은 사실 같다. 1947년 3월22일 미군정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인 노덕술이 화장실에 앉아 있던 선생을 체포했고, 심지어는 선생의 따귀를 때렸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



노덕술이 누구인가. 두 손 두 발을 결박해서 천장에 매달아 구타하고 코와 입에 물을 들이붓는 물고문을 자행하는 등 독립투사 3명을 고문치사한 악질경찰이었다. 선생은 그런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한 후 의열단 동지에게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고 통곡하며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고 했단다. 약산은 그로부터 1년 뒤인 1948년 월북한다. 좌우합작을 추진했지만 남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하고 노덕술 같은 자들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월북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렇게 월북한 약산이 북한정권의 초대 검열상(감사원장)을 지냈다는 것이 독립운동 경력에 붉은 줄을 쳐놓았다. 2005년부터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독립유공자 자격을 부여했다. 그러나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한 약산은 독립유공자 자격을 얻지 못했다. 


물론 약산은 한때 공산당 재건동맹에 참여했고,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때는 장제스(蔣介石) 중국 국민당 정부 내의 골수 우익 조직으로 공산당 때려잡기가 임무였던 ‘남의사’의 지원을 받았다. 비판이 일자 약산은 “일제 타도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이면 누구와도 손잡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 군정의 일각에서도 “약산은 우익과 좌익 사이에서 화해를 주선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비공산주의 계열의 좌익지도자”라 표현했다.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지론을 지닌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이즈음에 다시 노덕술을 떠올려본다. 1949년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된 노덕술은 ‘나라에 요긴하게 쓰일 기술자’라는 이유로 풀려났다. 육군 헌병대장으로 변신한 노덕술은 한국전쟁 도중에 화랑 및 충무무공훈장을 3개나 받았다. 약산이 그 장면을 보았다면 너무도 기막힌 일이 아닌가.


<이기환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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