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원균과 쇄미록


“우수사는 이달 초 전라 좌·우 수군과 함께 나가서 적선 80척을 나포해서 700여명의 수급을 베었다. 초 10일에도 적선을 만나 80여척을 사로잡았다.” 1592년(선조 25년) 7월26일 오희문(1539~1613)의 일기인 <쇄미록>(사진)에 기록된 승전보이다. 전투를 주도한 우수사는 바로 경상 우수사인 원균(1540~1597)을 가리킨다. 전라 좌·우 수군의 지휘관은 이순신과 이억기이다. <쇄미록>에 따르면 승전보의 주인공은 원균이다. 이 밖에도 “원균이 지난달에 적선 10여 척을 불태웠다 하고…” “수군절도사 원균이 적선 24척을 불사르고 적병 7명의 수급을 베었다는 소식을 담은…”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원균이 결코 모함가이고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이순신과 원균의 반목과 갈등은 극심했다. ‘전공다툼’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칠천량 전투의 패배(원균)와 명량대첩 등의 승전보(이순신)에서 극명하게 갈렸다. 또 하나의 차이는 <난중일기>라는 ‘기록’을 남긴 이순신과 그렇지 않았던 원균이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당대의 여론을 반영한 포의의 선비 오희문의 일기가 원균의 공적을 객관적으로 소개한 셈이다.


오희문은 또 ‘진·가짜 의병’을 솎아내는 감별사였다. “이름만 의병일 뿐 실은 도망쳐 죄를 얻은 관군이 죄다 모여 처벌이나 면하려는 수작인 자”들도 있고, “왜놈의 머리가 아니라 왜병에게 살해된 백성의 머리털을 깎은 뒤 머리만 베어온 자들”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의병의 이름에 걸맞은 사람은 영남의 곽재우와 김면, 경기의 홍계남,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김천일과 고경명뿐”이라고 소개했다.


<쇄미록>을 읽으면 다시 한번 일본인의 잔학성에 치를 떨게 된다. 긴 나무에 백성들의 머리를 무수히 걸었는데, 이미 부패해서 살과 뼈는 떨어지고 머리털만 남아 있거나 망건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고발했다. “여자들을 돌아가며 강간했는데, 여자의 치마를 들춰보니….” 차마 <쇄미록> 전문을 인용할 수 없을 정도로 농락당한 여성들 앞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 또 “최근엔 걸인도 드물다. 두어달 사이에 굶어죽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서 육촌의 친척도 죽여 씹어먹는다”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문자 그대로 ‘헬조선’에서도 한집안의 가장, 남편, 아들로서, 노비의 주인 혹은 양반가문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했던 한 개인의 분투가 일기에 녹아 있다.


<이기환 선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