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인종의 절친 김인후의 통곡

하서 김인후(1510~1560)는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 중 유일한 호남 출신 인물이다. 관직은 ‘옥과(곡성) 현감’으로 끝났지만 ‘영남에 퇴계(1501~1570)가 있다면 호남엔 하서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선 선비의 귀감이 된 분이다. 그런데 이 선비가 해마다 7월1일이면 뒷산에 올라 밤낮 통음하고 미친 듯 대성통곡하는 ‘두 얼굴의 사나이’로 바뀌었다. 무슨 곡절인가. 



7월1일은 바로 제자이자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인종(재위 1544~1545)의 기일이다. 5살 연상인 하서는 31살 때 26살인 세자(인종)의 스승이 된 이후 남다른 브로맨스를 과시했다. 싱싱한 배 3개를 선물로 주고, 당대 최고의 신간으로 중국에서 직수입한 <주자대전>을 한 질 하사했다. “내(인종)가 옥좌에 오르면 당신에게 성리학의 해석을 맡기겠다”는 무언의 다짐이었다. 세자는 어느 날 숙직실에 있던 김인후를 몰래 불러 비단 위에 대나무를 그린 ‘묵죽도’(사진)를 하사했다. 김인후는 충성을 다짐하는 화답시를 지었다. “…굳은 돌, 벗의 정신이 깃들었네(石友精神在範圍). 조화를 바라는 임금의 뜻을 이제 깨닫노니(始覺聖神모造化)….”


하지만 25년간 세자 생활을 보내고 옥좌에 오른 인종은 불과 8개월 만에 승하한다(1545년). 공식 사인은 ‘부왕의 죽음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간에는 계모인 문정왕후(1501~1565)의 짓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김인후는 인종이 위독해지자 “어의의 약처방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급기야 온갖 유언비어 속에 인종은 승하하고 만다. 김인후는 인종을 죽인 범인이 ‘문정왕후’라 확신하면서 “궁궐 안 욕심 많은 여자(문정왕후 등)가 권세를 손에 쥐면 인륜이 땅에 떨어진다”고 통곡했다. 이후 김인후는 “초야에 묻힌 김인후와 이황 없이는 곧은 정치를 펼 수 없다”는 조정의 의논에 따라 명종의 부름을 받았지만 끝내 거절했다. 대신 해마다 7월이 다가오면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난 인종을 위해 통곡했다.


최근 국제기념물 유적협의회(ICOMOS)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권고한 ‘한국의 서원’ 9곳 중에 하서 김인후를 모신 ‘필암서원’(전남 장성)이 있다. 성군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인종이 김인후 같은 스승이자 벗과 함께 정사를 펼쳤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용없는 가정법이지만 한번쯤 해보는 상상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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