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노인의 열 가지 좌절

송나라 주필대가 <이로당시화>라는 책에서 소개한 ‘노인의 열 가지 좌절’이 있다. 첫째, 최근 일은 기억하지 못하고 먼 옛날 일은 기억한다. 둘째, 가까운 곳은 보이지 않고 먼 곳은 잘 보인다. 셋째, 울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고 웃을 때 눈물이 나온다. 넷째, 밤에는 잠을 못 자는데 낮에는 잠이 온다. 다섯째,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 움직인다. 여섯째, 부드러운 음식을 마다하고 딱딱한 음식만 찾는다. 일곱째, 자식은 아끼지 않고 손주만 아낀다. 여덟째, 큰일은 묻지도 않고 사소한 일에 잔소리한다. 아홉째, 술은 적게 마시고 차는 많이 마신다. 열째, 따뜻할 때는 나가지 않다가 추우면 나간다.

노안과 단기기억 감퇴는 노화의 대표적 증상이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건 눈이 건조해서고, 웃거나 재채기할 때 눈물을 흘리는 건 눈꺼풀의 기능이 떨어지거나 코눈물관이 막혀서란다. 낮잠이 늘고 밤잠이 늘어나는 것도 노인의 전형적인 수면 패턴이다.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가만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치아가 워낙 부실하니 딱딱한 음식만 찾는 것처럼 보인다. 자식보다 손주를 아끼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식에게 하는 잔소리도 사랑의 다른 표현 아닐까. 알코올 분해 능력이 떨어져 주량은 줄지만 구강이 건조해져 차를 자주 들이켠다. 추위를 아랑곳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온도 변화에 둔감한 탓이다. 

조선의 성호 이익이 여기에 몇 가지를 덧붙였다. 첫째,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보면 잘 보이는데 눈을 크게 뜨고 가까이 보면 희미하게 보인다. 노안의 또 다른 증상이다. 둘째, 바로 옆에서 하는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데 조용한 밤에는 비바람 소리가 들린다. 청각 저하다. 셋째, 자주 허기가 지지만 밥상을 마주하면 잘 먹지 못한다. 식욕부진이다. 나이 많은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나도 하나둘 체감하는 중이다. 의학의 힘을 빌려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노화에 따른 신체적 변화는 피할 수 없다.

노인의 좌절이 신체적 변화뿐이라면 받아들일 만하다. 문제는 노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좌절을 겪어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 노인의 현실이다. 그래서 나도 덧붙여본다. 첫째, 일을 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없다. 둘째, 일을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둘 수가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 노인을 좌절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은퇴한 노인들이 계속 일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생계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자기실현을 위해서기도 하다. 일하는 사람은 사회와 호흡하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하지만 경험 많고 노련한 인력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는 노인도 있다. 불편한 몸을 끌고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일을 누가 하고 싶어서 하겠는가. 그런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일하고 싶은데 일하지 못하고, 쉬고 싶은데 쉬지 못하는 노인의 현실이야말로 OECD 최고 수준이라는 노인 빈곤율의 원인이다. 연금의 소득대체율은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고, 양질의 일자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회성 공공근로가 고작이다. 세금을 쏟아부어 억지로 만드는 일자리가 얼마나 오래갈지 의문이다. 

일해서 가난을 벗어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는 노인만 좌절하는 사회가 아니다. 젊은이에게도 희망이 없는 사회다. 해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다. 저출생과 고령화 사회는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실이다. 노년의 나를 기다리는 것이 좌절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급선무다. 노년에도 일하고 성취하는 인생은 계속된다는 희망이야말로 노인의 좌절을 극복하는 힘이다.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연재 | 역사와 현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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