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수학여행과 쇼트커트

수학여행을 하루 앞두고 아이가 미용실에 다녀왔다. 이쁘게 다듬은 머리를 보자, 문득 나의 수학여행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을 앞두고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처음 가보는 단체여행에 설레어하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니, 나의 긴 머리가 이 여행의 짐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내 머릿결은 적어도 이틀에 한번은 감아줘야 하는데, 여러 명이서 방을 쓸 것이니 분명 머리 감기가 힘들 게 아닌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단호한 결정이 필요했다. 머리카락을 자르자! 그것도 감기 쉽게 쇼트커트로! 그때까지 긴 머리밖에 안 해보긴 했지만, 머리카락 길이에 연연해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그다지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원하게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등교한 날, 학교 선생님들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이셨다. “역시 공부 잘하는 애는 다르구나! 공부에 전념하려고 머리도 이렇게 짧게 깎고.” 이게 무슨 말씀인가. 나는 수학여행 때 편하게 놀려고 잘랐을 뿐인데? 거기다 머리카락 길이와 공부는 또 뭔 상관이란 말인가.

이때는 조금 당황하긴 했어도, 어른들이 공부 잘하는 나를 늘 긍정적으로 해석해주는 데에 익숙하긴 했다. 워낙 잠이 많아서 집에서 잘 만큼 자도 학교에서 늘 졸던 나를, 선생님들은 집에서 매일 밤새워 공부하느라 그런 줄 아셨다. 다른 학생이라면 한마디쯤 했을 법한 건에 대해서도 내가 그러면 별소리 없이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교복 치마가 조금 짧아도, 반짝이는 화려한 머리끈으로 긴 머리를 바짝 올려 묶어도 말이다. 수학여행 이후 다시 머리를 길러 졸업 때까지 긴 머리를 유지했지만, 어느 선생님도 내 공부 태도와 머리카락 길이를 다시 연관짓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면 이렇게 학창 시절이 편하다. 세상이 나의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해주니, 자신감도 넘치게 된다.

이런 학창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면 세상이 내 맘먹는 대로 돌아갈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옛날에 과외했던 제자를 만나 담소를 나누다 “내가 그 분야를 했으면 그것도 잘했겠지만…”이라고 무심코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제자가 신기하다는 듯 얘기했다. “명문대 출신은 무엇이건 자기가 하려고 맘만 먹었으면 잘했을 거라고 한다더니 선생님도 그러시네요?”라고. 그 얘기에 약간 당황했다. 그렇다. ‘나의 이 검증된 지능이라면, 뭘 한들 못했겠나’ 하는 오만에 나도 모르게 빠져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조금 접어주고 갈 수 있다. 20대 때야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으니, 사법시험을 봤다면 훌륭한 판사가 됐을 수도 있고, 언론사에 들어갔으면 유명한 기자가 됐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늙어서까지 이러면 문제다. 다 늙어서도 ‘지금이라도 내가 하면 그 사람들만큼 못하겠냐’라고까지 생각한다면 말이다. 남들이 20년, 30년씩 쌓아온 전문성을 무시하고, 다른 분야는 그 분야 나름의 논리와 윤리가 있어 내가 쉽게 볼 게 아니란 걸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다 학창 시절 시험 문제 잘 푼 지능을 지니고 있으니 지금도 권력을 쥐는 것이 당연하다고까지 여기면 사회적 재앙이 된다. 어떤 조직에서건 권력은 공적 의무감과 책임감을 지닌 자들이 다루어야 하거늘, 그런 건 쥐뿔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다른 이의 전문성까지 무시한다면, 그 권력은 제어받는 것을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는 즐겁게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성산일출봉은 생각보다 좋았고, 해물 오분자기는 너무 비렸다고 한다. 식구들은 인파로 북적대는 속에서 단풍 구경을 하며, 짧은 가을날을 누렸다. 이 모든 무사함에 나는 안도한다. 나의 안도함에 부끄러워하며 그러지 못한 이들을 위해 애도한다. 그리고 이 당연해야 할 무사함을 지킬 책임을 진 이들의 무책임함에 분노한다.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연재 | 역사와 현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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