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모데르누스

며칠 전 대학 동기들의 단톡방에 한 친구가 흥미로운 요청을 올렸다. 광화문에 나갔다가 퀴어축제 참가자들과 태극기를 든 사람들의 행진을 동시에 보았단다. 스피커 성능이 좋아서 양쪽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가 먹먹하고 정신이 없었다고. 친구는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던 일의 혼란스러움을 토로하며 다른 친구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 친구가 전한 내용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런 양상이 조만간 사그라질 것 같지도 않다. 현재 우리가 보고 듣는 소란스러움 혹은 혼란스러움이 단지 특정한 사회적 이슈나, 더 나아가 현 정권에 대한 개인적 호오(好惡)에서만 비롯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저마다 개인적으로 쌓아온 삶의 경험들과 각자의 상식 차이가 원인일 것이다. 어찌 됐든 이제 우리는 ‘저쪽 편’에도 모종의 진정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역사 공부를 하며 나이 들면서 저절로 얻게 된 혜택을 발견한다. 시간에 대한 개인적 감각이 생긴다는 점이다. 추상적이던 시간의 양을 개인적으로 경험한 구체적 시간으로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주변의 50세쯤 되었던 사람들이 한국전쟁의 야만적 경험에 대한 기억을 어제 일처럼 머리와 가슴에 지니고 있었을 것임을 그 나이가 되어서야 알았다. 그들이 왜 국가폭력에 둔감했는지 그때는 몰랐다. 대학 시절 강의시간에 교수님이 4·19혁명을 강의할 차례가 되면 약간 망연해했던 이유도 대략 짐작하게 되었다. 그분에게 그 일은 당신과 무관한 객관적이기만 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으리라.


사람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과거에 대해서는 추상적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지금 대학생들은 아마도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항쟁이 저절로 구분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경험한 시간이라 해도 사정은 비슷하다. ‘꼰대’들이 지탄받는 가장 큰 이유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의 과거 경험에 고착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은 추상적이고 경험한 시간은 구체적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 세상의 실제 변화와 차이가 있는 것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세상의 실제 변화와 그에 대한 주관적 인식 사이에 괴리를 느낄 때 우리는 당황하거나, 분노하거나, 혹은 무기력해진다.


‘근대’나 ‘현대’를 뜻하는 ‘modern’은 라틴어 모데르누스(modernus)에서 나왔다. 이 말은 5세기 말 로마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기독교가 공인된 그 당시 세상이 많은 점에서 이전 로마 시대와 달라진 것을 가리키기 위한 말이다. ‘현대’라는 말이 ‘고대’의 끝자락에서 나왔다는 점은 흥미롭다. 모데르누스는 특정한 세상의 내용이 아닌, 그 세상에 대한 낯섦을 가리킨다. 서양에서 18, 19세기 사람들이 이 단어를 다시 끌어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익숙하고 그래서 당연했던 이전까지의 세상과 지금 세상이 불연속적인 것, 과거 경험으로 현재를 판단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부적절함을 함축한 말이 바로 ‘modern’이다. 그런데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일은 흔하다. 그런 점에서 모든 시대가 ‘modern’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 공부의 궁극적 목적 중 하나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해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도대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짐작하려고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낯선 지역에 가서 먼저 동서남북을 가늠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1910년 경북 안동의 한 학교에서 일어난 일은 도움이 된다. 1907년 현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위치한 곳에 동산 류인식이 ‘협동학교’를 세웠다.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안동 내앞마을 옆이다. 학교가 세워진 지 3년 뒤인 1910년에 이 학교는 인근 지역 의병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학생과 교사를 모두 합해 30명 안팎이던 학교에서, 그 습격으로 학교의 교감, 교사를 포함해서 3명이 살해되었다. 이유는 이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단발(斷髮)을 했기 때문이다.


1910년 무렵 독립운동 진영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위정척사파’와 ‘실력양성파’이다. 전자는 무력에 의한 즉각적 의병투쟁을 통해 일본을 물리쳐야 한다는 쪽이고, 후자는 우선 교육과 산업을 통해 실력 양성에 힘써야 한다고 믿었다. 전자는 후자를 배신자로 생각했고, 후자는 전자를 시대에 뒤진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단발이 두 진영의 갈등에 도화선이 됐고, 결국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 나라의 독립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선 서로 생각이 다르지 않았지만 실천 방법의 차이로 갈등이 폭발했던 것이다.


두 진영의 상대편에 대한 생각은 어떤 점에서는 맞고 어떤 점에서는 틀렸다. 1910년 당시 국내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은 무모했다. 하지만 그 후 만주에서 진행된 무장항일운동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운동사는 얼마나 빈약한 것이 되었겠는가. 위정척사 진영도 실력양성 진영을 잘못 보았다. 만주 무장항일운동의 주요 세력이 바로 실력양성 진영의 후예였다. 그럼에도 위정척사 진영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도 아니다. 국권 상실 후 실력양성 진영의 주요 인사들이 친일파로 전향했던 것도 사실이다. 1910년은 이런 양상들이 아직 표면화되기 이전이다. 상대편을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상대편 자체를 부정할 일은 아니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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