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문제는 절차다

조선왕조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공훈을 세운 사람을 공신(功臣)으로 책봉했다. 공신 책봉은 총 28차례였다. 조선 건국에 기여한 개국공신(開國功臣),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 인조반정을 주도한 정사공신(靖社功臣) 등이 대표적이다. 공신은 등급에 따라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세금과 부역이 면제된다. 관직 등용의 기회와 처벌 경감의 약속도 빠뜨릴 수 없다. 이 같은 혜택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에게 주는 상이자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든든한 보험이다. 국난이 일어나면 공신의 혜택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신의 자격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란이 되곤 했다. 사림파가 집권하자 훈구파에 속하는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상당수와 위사공신(衛社功臣)은 공신 자격을 박탈당했다. 광해군이 네 차례에 걸쳐 책봉한 위성공신(衛聖功臣), 익사공신(翼社功臣), 정운공신(定運功臣), 형난공신(亨難功臣)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면서 전부 무효가 되었다. 서인이 대다수인 보사공신(保社功臣)은 남인이 집권하자 취소되었다가 다시 서인이 집권하면서 복구되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경종을 등에 업은 소론 중심의 부사공신(扶社功臣) 역시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집권하면서 말소되었다. 이처럼 자격 논란에 휘말려 취소된 공신이 전체의 4분의 1에 가깝다. 그 결과 충신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전락하고 역적이 충신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단순히 정권교체에 따른 정치 보복이라고 폄하할 수만은 없다. 보기에 따라서는 시대적 변화에 상응하는 일종의 재평가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그 또한 권력의 향배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국가유공자 자격 논란으로 보훈처가 입방아에 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유공자의 자격 논란은 어찌보면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그중에서도 독립유공자 선정을 둘러싼 갈등이 가장 첨예하다. 독립운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친일행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 사회주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따라 자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해방 후 이력까지 고려하면 더욱 복잡해진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 사실관계조차 불분명한 지금으로서는 논란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 역사를 정쟁의 도구로 삼는다는 비판이 없지 않지만, 유공자 자격 논란은 역사 의식의 심화와 역사 해석의 다양화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은 자격보다 절차다. 자격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공정하고 엄격한 절차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


보훈처의 국가유공자 심사 절차는 엄격하기로 정평이 났다.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탓에 유공자로 인정받기에 손색없어 보이는데도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중에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임시정부에서 국장(國葬)까지 치러준 사람도 있고, 3·1운동으로 투옥되어 옥사한 사람도 있고,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입을 모아 애국자라고 칭송한 사람도 있다. 이들은 생전의 한마디 말, 한 가지 행동이 걸림돌이 되어 결국 보훈처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관점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한 말과 행동이다. 


심사를 철저하고 신중하게 하겠다는 보훈처의 태도는 나무랄 것이 못 된다. 다만 이로 인해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여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미서훈 독립유공자가 적지 않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후손들은 수십 년에 걸쳐 증거를 찾고 서류를 보충하여 거듭 서훈을 신청하지만, 보훈처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그들의 피나는 노력을 지켜본 나로서는 실상을 증언할 의무가 있다.


후손들이 대단한 혜택을 바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자녀라면 몰라도 손자나 증손쯤 되면 후손이 받는 실질적인 혜택은 미미하다. 그런데도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보훈처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는 단 하나, 정당한 평가를 통한 명예 회복이다. 그렇기에 심사 절차는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투명하고 공정해야 한다. 


손혜원 의원의 부친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는 과정에 특혜가 있었다는 의혹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정해진 절차대로 엄정한 심사를 거쳤다면, 좌익 활동이니 간첩 혐의니 운운하며 자격을 논하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이다. ‘너희들 아버지는 뭐했냐’는 반문 역시 논점을 흐릴 뿐이다. 미서훈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문제는 자격이 아니라 절차다. 새로운 증거를 제시해도 보훈처가 이미 내린 결정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 탓에 후손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전화 한 통으로 심사를 신청하고 서훈을 받았다는 해명을 그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 유공자 자격 논란과는 별개로, 그 절차적 의혹은 명백히 밝혀져야 한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오늘날까지 여전히 소외된 채로 남겨진 미서훈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기회는 평등했는가? 과정은 공정했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결과가 정의로울 리 없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 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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