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잃어버린 고전과 책 사냥꾼

최근 정부가 ‘인문사회 학술생태계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대학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인문사회 연구자를 지원하고, 인문학술 연구를 총괄할 전담기구를 설립하는 것이 정책의 기본골자다. 정부가 나서 인문학을 육성하겠다고 발표할 정도로 현재 인문학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게 사실이다. 대학들은 경제적 수익성이 높은 학문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인문학, 기초과학 등은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홀대하고 때론 학과를 폐지하기도 한다. 지식 생산의 불균형은 결국에는 우리 사회의 장기지속적인 성장과 도약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수익성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가 균형 잡힌 학문 생산을 어렵게 만든다면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종교적 편견이 학문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오랫동안 중세 유럽 기독교 사회는 신학 이외의 학문을 등한시했고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학문을 이교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하고 배우려 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교부인 히에로니무스 같은 신학자도 신학에 몰두하기 위해 한때 그토록 좋아했던 고전 공부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한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호라티우스가 시편을 읽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베르길리우스가 복음서를 이해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키케로를 읽는다고 바울을 알게 되겠는가?”라면서 고대 이교도의 저작을 멀리하라고 충고까지 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인문학이 학생들을 악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학업을 포기하고 종교적인 삶에 헌신하기로 한’ 성 베네딕투스의 결심을 칭송하기도 했다. 이제 고대 이교도의 작품들을 읽는 것은 불경스러운 죄악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고대 문헌들은 연구는커녕 보존되기도 힘들었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기까지는 그 후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 첫 발걸음을 내딛은 사람은 14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였다. 페트라르카를 필두로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인문학(studia humanitatis) 붐이 일기 시작했지만 정작 공부에 필요한 유명한 고전 작품들이 대다수 유실된 상태였다. 그나마 책을 보존한 유일한 기관은 수도원이었다. 사실 수도원이 책을 보존했던 것은 엄밀하게 말해 공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수도사들은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고, 마침 수도회의 회칙 또한 독서와 필사를 중요한 일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수도사들은 큰 관심 없이 기계적으로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루크레티우스 등 고대 작가들의 저작을 필사해 책을 보존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고 덕분에 고전 작품의 일부가 그나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수세기 동안 수도원 도서관에서 모두에게 잊혀진 채 묻혀 있었던 고전 작품들이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는 수도원 도서관을 뒤지면서 ‘책 사냥’을 시작했다. ‘책 사냥꾼’으로 명성을 날린 첫 번째 인물은 페트라르카였다. 그는 프랑스 샤르트르에서는 고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저작 <로마 건국사>를, 파리에서는 로마 제국 초기의 시인 프로페르티우스의 필사본을, 베로나에서는 키케로가 아티쿠스에게 보낸 서신을, 벨기에 리에주에서는 키케로의 <아르키아스를 위한 변론>을 발견했다. 페트라르카에 의해 되살아난 키케로의 글들은 이후 인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키케로의 글들은 인문학의 개념과 미덕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문주의자들이 공적 문서를 작성하고 연설을 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실용적인 교본 역할도 했다. 


15세기 초반 책 사냥꾼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교황청 서기이자 인문주의자였던 포조 브라촐리니였다. 그는 고대 세계의 유산을 찾아내는 데 온 열정을 바친 그 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책 사냥꾼이었다. 1417년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1400년 넘게 묻혀 있었던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저작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발견했다. 한 역사가는 이 책의 발견이 근대의 탄생을 돕는 산파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사멸하며, 사후에 받아야 할 심판도 없으며, 신성한 힘이 있어 우리를 위해 이 우주를 창조한 것도 아니며, 사후 세계에 대한 모든 관념은 전부 미신적인 환상이라는 루크레티우스의 불온한 충고들은 중세 유럽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고 짓누르는 종교의 무거움으로부터 점차 벗어나 근대로의 느린 발걸음을 내딛는 데 일조했다.


지식은 사회 공동의 자산이기에 모든 분야의 지식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프랑스 국립연구센터(CNRS)의 설립 목표는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부러울 따름이다. 세계사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고대 로마 제국, 중세 이슬람의 아바스 제국 등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수집하고 연구해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고 그 덕분에 찬란한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반면에 당장의 현실적인 필요성과 수익만을 중시하는 근시안적 생각은 우리 사회의 학문 발전의 불균형을 초래해 왔다. 이러한 불균형적인 학문 생태계가 계속된다면 조만간에 우리도 600년 전 유럽처럼 책 사냥꾼이 필요해질지도 모르겠다.


<남종국 이화여대 교수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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