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민주주의와 투표

한 달 후면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투표는 민주주의 제도의 꽃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투표를 잘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투표를 제대로 하기는 여러 면에서 쉽지 않다.


민주정치를 최초로 실시했던 고대 아테네에서도 일부 철학자들은 대중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에 민주정은 그렇게 이상적인 정치제도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플라톤은 철인 왕이 다스리는 철인정치가 가장 이상적이고, 민주정은 법이 지배하는 정치체제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정치제도라고 말한 바 있다. 


민주주의체제가 대의제 형태로 본격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에도 투표와 선거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제약을 받았다. 먼저 후보자에 대한 정보 부족이 선거를 인기투표로 전락시키곤 했다. 1848년 프랑스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그를 뽑게 된 주된 이유는 그가 황제 나폴레옹의 조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와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알려지게 된 사실이지만 DNA 분석 결과 그와 나폴레옹 1세 사이에는 아무런 생물학적 연관관계가 없었다. 이 무능한 나폴레옹의 조카는 1851년 국민투표에서 97%라는 압도적 지지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저술한 프랑스 출신의 정치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그를 “불가사의하고 침울하고 대수롭지 않은 돌대가리”라고 표현했다. 토크빌 외에도 많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루이 나폴레옹에게 반발했고 19세기 프랑스를 위대하게 빛낸 문호 빅토르 위고는 해외로 망명을 떠나기도 했다. 


특정 집단이나 타민족에 대한 혐오와 거짓 선동도 잘못된 선택을 초래한다. 1930년대 히틀러와 나치당이 독일에서 정권을 잡게 된 것은 무력에 의한 쿠데타가 아니라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서였다. 히틀러가 집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구호는 반유대주의와 반공산주의였다. 소상공업자로 대변되는 중산층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유대인 자본가들을 혐오했고, 우파들은 유대인 출신 혁명가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여기에 더해 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치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고, 1929년 시작된 경제공황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던 독일의 보통 사람들은 위대한 독일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히틀러와 나치의 선전 선동에 쉽게 매혹되었다. 


오늘날 ‘올바른’ 투표를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는 정당과 정치인들의 부정적인 선거 전략과 교묘한 구호일 것이다. 미국의 정치평론가이자 역사학자인 토머스 프랭크의 책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는 이러한 사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은 미국 캔자스의 노동자들, 빈민층,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이익보다는 부자와 기업의 이익을 더 대변하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현상을 분석했다. 그의 이야기를 빌리면 노동자,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당은 민주당이다. 그런데도 캔자스의 경우처럼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점점 몰락해가는 농촌 마을인 네브래스카주의 맥퍼슨 카운티 사람들이 공화당 후보 조지 부시에게 80%가 넘는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이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에 대해 프랭크는 보수 우파의 교묘하고 은밀한 선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보수주의 공화당은 반지성주의 전략을 활용하고 기독교 근본주의와 결합해 캔자스 사람들의 불만을 민주당과 지식인들의 탓으로 돌렸다. 구체적으로 이들 우파는 선거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경제 문제를 정치 의제로 내세우기보다는 낙태와 동성애, 진화론, 공산주의 등의 종교적이고 윤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에 시민들의 관심과 분노를 집중시켰다.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위선적인 정치인들의 문화 전략에 쉽게 속아 제대로 된 선택을 못한다는 주장에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미국 사회를 분석한 프랭크의 책이 선거철마다 자주 거론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남종국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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