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여적]독립유공자 가네코 후미코

1926년 3월25일 두 남녀가 일왕 암살을 꾀한 ‘대역죄’ 혐의로 일본의 법정에 섰다. 남자는 조선 예복에 사모관대 차림을 하고, 여자는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이들은 “우리는 조선인이므로, 재판도 조선말로 할 것이니 통역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재판장은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순간 여자는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남자는 “재판은 비열한 연극이다”라고 외쳤다.

 

법정에 선 남녀는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였다. 둘은 도쿄에서 만났다. 아나키즘에 깊이 공감하며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저항했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때 두 사람은 체포됐다. 이듬해 심문과정에서 폭탄입수 계획이 드러나면서 둘 다 일왕 암살을 꾀한 대역죄로 재판에 회부됐다.

 

영화 <박열>의 주인공 ‘박열’이 일제의 대법원 판결 과정에서 재판부를 향해 일갈하고 있는 장면이다.

 

가네코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옥중에서 숨졌다. 해방 뒤 석방된 박열은 6·25 때 북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숨졌다. 가네코는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박열은 평양에 묻혔다. 박열은 1989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가네코는 ‘독립운동가 박열을 사랑한 일본인’으로만 알려져 서훈 대상에서 제외됐다.

 

국가보훈처가 가네코 후미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하며 독립운동가로 포상키로 했다. 가네코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고, 전기와 옥중 수기가 소개되면서 그의 독립운동이 새롭게 조명됐기 때문이다. 영화 <박열>은 가네코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기여했다. 가네코는 2004년 애족장을 받은 후세 다쓰지에 이어 두번째 일본인 독립유공자가 된다.

 

1949년 정부의 독립유공자 선정 작업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모두 1만5180명이다. 이 가운데 외국인은 가네코를 포함해 70명. 나라별로는 중국이 33명으로 가장 많고 미국 21명, 영국 6명, 캐나다 5명, 일본 2명, 프랑스 1명이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운동이 중국, 일본, 유럽, 미주 등 전 세계에서 전개됐음을 생각하면 적은 숫자다. 외국인 독립유공자 발굴은 한국을 도운 외국인에 대한 보상이자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의 국제적 연대성과 세계사적 보편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앞으로 외국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이 활발히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조운찬 논설위원>